◇ 시인과 시(현대)

신해욱 시인 /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6. 23:00
신해욱 시인 /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신해욱 시인 /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모르겠어 이 밤은 모르겠다

있어야 했을 그 밤을

이 밤이 차지하고 있다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그러자 드러나고 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그러자 나는 서두르고 있다

그 밤에 사로잡혀

이 밤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러자 나는 빗자루를 들고 있다

바닥을 쓸고 있다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쓸고 있다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시집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에서

 

 


 

신해욱 시인 / 그때에도

 

 

 나는 오늘도

 사람들과 함께 있다.

 

 누군가의 머리는 아주 길고

 누군가는 버스를 탄다.

 

 그때에도

 이렇게 햇빛이 비치고 있을 테지.

 

 그때에도

 당연한 것들이 보고 싶겠지

 

-시집 《간결한 배치》, 2005, 민음사

 

 


 

 

신해욱 시인 / 미메시스

 

 

가만, 하나가 흙을 쥔 채로 동작을 멈췄다. 맴도는 것이 있어.

 

들어 봐. 법이 있대.

 

법이. 씀바귀는 법이. 숨 막히는. 숨바꼭질에는. 법이. 숨는 법이 있냐는데. 하나는 소리를 죽이며 더듬거렸다. 숨겨 달라는 것 같아.

 

아니야. 하나가 머리를 저었다. 찾아 달라는 거야.

 

바비라는데. 하나는 두리번거리며. 인형을 잃어버렸나 봐. 맴돌다가 놓친 거야. 바비도 인간이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대.

 

아니야. 하나는 미간에 힘을 모았다. 들어 봐.

 

법인이래. 법인. 하나는 흙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법인으로 태어났대. 법인도 인간이래. 인격이 있대. 권리가 있대. 쉴 데가. 숨을 쉴 데가 필요하대. 모습을 달래.

 

놀이터의 흙은 부드러웠다.

 

우리는 흙장난을 하고 있었는데. 흙. 흙. 흙 필요한 분. 흙. 흙. 흙에 묻힐 분. 자연의 노래를 부르며. 무법지대를 일구며. 흙을 줄게. 넋을 다오. 흙집을 짓고 있었는데.

 

우리가 부른 거야. 하나는 고개를 떨궜다.

어깨를 달래. 어깨동무를 하고 싶대. 동무가 되고 싶대.

 

우리는 어깨가 무거웠다.

 

손도 달래. 입도 달래. 군것질을 해 보고 싶대.

 

우리는 토우를 벗어야 했다.

 

우리는 흙손으로. 한 덩이. 한 덩이의 엉덩이. 엉덩이 위에 엉덩이. 무너진 어깨. 측면의 입. 법적인 뉘앙스. 앞뒤가 맞지 않는 표정의 싱거움. 구김살의 없음.

 

리얼리티가 부족했다.

 

-『문학동네』, 2022-겨울

 

 


 

 

신해욱 시인 / 섀도복싱

 

 

거기 있다는 걸 안다.

빈틈을 노려 내가 커다란 레프트 훅을 날릴 때조차 당신은 유유히 들리지 않는 휘파람을 불며 나의 옆구리를 치고 빠진다.

크게 한 번 나는 휘청이고

저 헬멧의 틈으로 보이는 깊고 어두운 세계와 우우우, 울리는 낮게 매복한 소리.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완악한 힘에 맞서 당신을 안아버리는 이 짧고 눈부신 한낮.

부러진 내 갈비뼈 사이의 텅 빈 간격으로 잠입하는 당신에 대해

당신의 그 느린 일렁임에 대해

나는 단지 말하지 않을 뿐이다.

천천히 저녁이 열리면

이 헐거움을 놓치지 않으며 길고 가늘게 드러나는 당신.

빈틈을 노려 내가 복부를 공격할 때조차 당신은 정확히 내 팔 길이만큼만 물러서며 나를 조롱한다. 당신이

 

-『서울경제 / 시로 여는 수요일』 2023.11.29

 

 


 

 

신해욱 시인 /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물고기 알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이야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며

누군가의 웃음을

대신 웃으며

 

나는 낯선 공기이거나

때로는 실물에 대한 기억

 

나는 피를 흘리고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

 

- 시집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2009)

 

 


 

 

신해욱 시인 / 실비아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 개의 막대기로 재어본 주님의 길이는 너무도 초라한 것이어서

손님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꿇은 무릎을 한 번 더 꿇고

키를 맞추어야 했습니다

 

발소리가 다가왔습니다

 

물이 돌을 다루듯

할머니가 손님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뜨겁게 타버린 은혜

 

차갑게 결여된 의미

 

언제나 임박해 있는 시간

 

눈꺼풀이 떨렸습니다

 

 


 

 

신해욱 시인 / 아케이드를 걸었다

 

 

가게가 많았다

물건이 많았다

 

사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잘 떠오르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무지개떡 같은 것

리본 같은 것

아니면 장래 희망 같은 것

 

웃음이 나려고 했다

 

주마등 같은 것

축복 같은 것

휘두를 수 있는 낫과 호미와

녹다가 만 얼음 같은 것

 

아케이드를 걸었지 허락도 없이

 

전단지를 밟았다

 

비닐우산이 일제히 펼쳐지는 소리를 들었다

 

영원한 충격에 사로잡힌 얼굴을 보았다

 

아케이드를 걸었다

 

누구나 나를 앞질러 갔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신해욱 시인

1974년 강원도 춘천 출생. 한림대학교 국문과와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8년 《세계일보》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간결한 배치』 『생물성』 『syzygy』 『무족영원』 『창밖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