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안이숲 시인 / 유자라는 집 외 8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6. 08:00
안이숲 시인 / 유자라는 집

안이숲 시인 / 유자라는 집

돼지껍질보다 두꺼운 질감은

너무 환한 빛깔이어서

아무래도 하늘이 피부를 가졌을 거란 생각을 했죠

늦은 하늘에 유자 빛 땀구멍이 숭숭,

누군가의 허점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요

남해란 곳은 그렇습니다

벗기면 벗길수록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섬세한 피부를 가진

섬을 통째로 대패로 밀었을까요?

멸치 떼 같은 하늘이 떠나갈 때도 변함없이 샛노랗네요

단순히 빛깔이라고 하기엔, 너무 따스하지요?

땀구멍 하나에 마음 한 채를 가진

역마살 낀 목수를 떠올리며 유자차를 마십니다

남쪽의 마지막까지 내려와

천연 형광색 그물에 딱 걸려버린 당신

하늘과 바다 사이에 옹기종기 불을 켠 마을에

당신의 이웃도 있을까요?

올해는 돈 좀 벌어 집 한 채 꼭 마련하겠다는 당신의 결심으로

유자는 여전히 샛노랗습니다

눈부신 것들은 손이 잘 닿질 않고

줄자와 쥐꼬리톱이 들어있는 가방이라는 얼굴

당신의 피부는 올해 땀구멍이 더 커졌군요

유자의 성분이 필요하나요?

나는 가까운 사천으로 가는 꿈을 꿉니다

 

 


 

 

안이숲 시인 / 만년필

 

 

어쩌다 선물 받은 당신에게도 다리가 있었구나

전장에서 돌아온 퇴역 군인 같은

외발

 

눈 쌓인 바닥을 발 도장을 찍으며 함께 걸을까

 

이토록 오래되어 쓰지 않는 이야기

열 맞춰 걸어가면

쏟아지는 네 진심

 

사실은 군대 가 본 적도 없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엿가락처럼 허벅지를 분질러 먹은

산재 처리된 젊음이

하얀 눈발에 절뚝이는 꽃으로 피어날지도 몰라

 

왕년에 힘깨나 썼다는 전설은

우리들의 USB에 잘 저장해 두었어

 

잊혀 가는 너의 뒷모습을 첫사랑이라고 불러도 되겠니?

 

그 후 너의 연애는 지나가고

나의 연애도 지나가고

 

피아노 건반을 연주하듯 손가락을 움직이면

아스라이 비등점을 넘나드는 난타 소리를 들으며

 

불구의 너를 하룻밤 가지고 싶다

 

한쪽 발로 견디고 있는 당신의 추위를

따스한 손으로 꼬옥 안아 줄게

 

-시집 『요즘입술』(실천문학사, 2023) 수록

 

 


 

 

안이숲 시인 / 선풍기

 

 

세상의 어느 계절을 불러들였기에

이렇게 바람이 부는 걸까

 

자세를 고쳐 앉고 자세히 보니

그것은 오래전 나를 관통하고 지나갔던

바람

 

머릿결을 쓸어 넘기면 그 남자의 기억이 비듬처럼 떨어지고

A형의 피가 해바라기로 피는 계절이 오면

 

그리움은 바람을 먹고 자라나

사람이라는 영양제를 먹고 자라나

 

이쪽을 쏘아보고 있다면

사정없이 찔려 버려

 

뜨거운 생각을 하면 머릿속이 끓는 것처럼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으면

또다시 당신이 불붙을까?

 

뜸불산 자귀나무 아래 노랗게 핀 키스가 있었다

 

스무 살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피부를 스치는 온도부터 다르겠지만

스쳐간 그 남자가 피었다는 소식에

오늘

 

바람을 과식하고 있다

 

-시집 『요즘입술』(실천문학사, 2023) 수록

 

 


 

 

안이숲 시인 / 더 이상 타지 않는 젊음

 

 

버스 출입구가 닫히면 꾹 다문 입술 같았어요

 

입술 위에 올라탔지요

그러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는 정체를 했고

무늬 많은 나비는 꿈이 많았어요

 

입술이라는 버스에서 자주 내렸던 나

떠나지 못했던 날개들

 

발끝이 미장칼처럼 길어 나고

우리는 왜 그렇게 달리는 일만 생각했을까요

버스에서 내릴 때마다 손가락보다 가슴 안쪽이 더 시렸습니다

멀미를 할 거 같은 젊음 때문에

 

불 꺼진 골목 앞에서

날개를 접고 생각합니다

 

당신이라는 입술

이제는 타지 않는,

 

푸른 새벽은 수만 개의 아픈 별을 무찌르고

돋아난 생활은 어떤 시선에도 튕겨 나가지 않습니다

 

어깨를 움츠리고 새의 꿈을 따라 골목으로 숨어들던 젊음도

입을 꾹 다물고

달리는 버스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습니다

 

배달용 트럭을 한 대 사서 출퇴근을 겸용하거든요

 

 


 

 

안이숲 시인 / 요즘 입술

시속 120Km로 급발진하며 달려오는 입술을

키스로 받을 때

저녁은 수심 200미터 지하에서 헤엄치는 한 쌍의 아귀가 됩니다

입술을 담보로 살림을 차렸습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허기는 깊었고

 

식탁 위에서 환하게 웃으며 스파게티를 먹고 있는 집주인의 모습을

창문 밖으로 쳐다본 적 있습니다

네 면을 스틸, 목조, 콘크리트, 벽돌로 마감을 하였다는

저 집을 좀 압니다

 

외벽에 다른 질감의 디자인을 마감하느라 미장의

4번 척추가 휘었고

형광등이 노출되는 게 싫다고 천장을 파내라는 집주인의 호소에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듯 매달려 있던

당신 그림자에

작은 바다 하나 들어차곤 했다는 것을요

 

아귀는 뜨거울 때 먹어야 돼

100T 판넬 작업을 마친 당신이 시뻘건 아귀찜을 먹으며

잘린 아귀 입 한 조각을 쓰윽 내밀 때

저 화사한 집은 우리 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죄지은 인간들의 혼이 변하여 태어난 것이 아귀라는데

바다가 집인 우리는

비린내를 온 동네에 풍기는 한 쌍의 아귀 가족

 

하얀 접시 위에서 시속 120Km의 과속에 급브레이크를 밟는

남자의 겨드랑이에 붙여진

키스, 라는 부적을 불살라 버릴 그날은 언제쯤 오는 걸까요?

 

입술이라는 질긴 짐승이 살고 있어요

 

 


 

 

안이숲 시인 / 인어공주 육지 적응기

 

 

급히

동화속을 빠져나온 인어공주가 있다

 

결혼 한 달 전

철강공장에서 급발진하는 지게차 바퀴에 양쪽 발을 내어 주고

파혼과 지느러미를 선물 받은 언니는

전설 속 바다를 걸어 나온 왕족의 후예

 

왕자도 없는 육지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두 손으로 접영을 익히는 일뿐

 

도시의 빌딩 위로 일렁이는 불꽃들

때때로 시간인 꽃들이 피어나고

시들어 갈 때

어쩌면 언니는 남자의 아이를 꿈꿀지도 몰라

가족관계증명서에도 없는

 

김밥 한 줄 먹고 장애인 복지센터로 가는 길

구름은 제 기분으로 흘러가고

공주의 허세는 바퀴를 유지하는 힘

 

언니의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켜지면

지나가는 웃음에도 반짝이는 비늘을 달아 주어야 한다

 

덜컹,

반으로 접은 언니의 몸이 한 고비를 건너간다

 

 


 

 

안이숲 시인 / 콘텍트렌즈

 

 

 눈은 부드럽게 쌓이기도

 단단하게 얼기도 해요

 시야각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갖지요

 

 푸대 속보다 어둡다가

 마음 한번 열면 세상이 모두 그곳에 담기기도 하고

 눈속임을 당해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데요

 

 뱀 한 마리 수리부엉이의 입에 물려 공중을 날아가고 있네요. 서리맞은 사천강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변을 당했나봐요. 세상에 나와 개구리 한번 못 잡아먹은, 저 어리숙한 일당쟁이 뱀 한 마리. 건축업자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낭패를 당한 모양이네요. 제 것이라곤 가져 본 적 없는, 팔다리 없는, 몸뚱이 하나뿐인 뱀 한 마리가 제 몸을 뜯어 먹히고 있네요. 가족들은 주린 몸으로 돌아오지 않은 그를 기다리며 겨울잠을 자겠지요.

 

 봄은 너무 멀고

 

 눈은 눈싸움을 하기도 하지만

 눈감아 버리기도 하지요

 

 오늘도 나는 이 눈알을 빼,

 책상위에 올려두고

 눈속임 없는 설원의 잠속으로 빠져들까 합니다

 

-월간 『모던포엠』 2024년 6월호 발표

 

 


 

 

안이숲 시인 / 풋

 

 

소복소복 짙어가는 텃밭에는

지도에는 없지만

모르는 사람이 가까워지는 길과

오가는 발길에도 흔들리는 초록 줄기들이 있다

 

풋, 앞에

당신과 나는 같은 길을

혹은 반대편 길에서 붉어가고 있다

 

봄 한철이 생의 시작이고 끝인 한 세계

길옆의 길

걷다가 시든 생각이 문을 만든다

 

돌담을 덮은 먼지들

담을 깨뜨리는 맹렬함이 되지 못하지만

색깔을 뿌옇게 바꿀수는 있다

 

귀를 가진 잎들이 피우는 생각들

아득히 먼 것일수록 생각은 부지런하다

 

연일 비가 내리는 장마철에는 조금 더 많은 생각들이 자라나지만

쉽게 짓무르는 성질이 있고

한여름

텃밭의 생각은 체온의 영향이 깊다

 

햇살 푸짐한 날

덜 익었던 생각들이 드디어 속도를 내며 여문다

어깨동무를 하고 가는 친구처럼

 

밭에선 날마다 생각들이 자란다

 

-월간 『모던포엠』 2024년 6월호 발표

 

 


 

 

안이숲 시인 / 피자를 먹는 저녁

 

 

상자 속에서 너의 원형은 가지런하다

 

처음 뜨거웠을 때를 기억하나요, 당신

한입 베어 물며 대화를 할 때 입가로 조금씩 새어나가던

뜨겁고 단내 나는 웃음

 

전자레인지에 남은 조각을 다시 데워야 할까

대부분 식어버린 상대방의 표정을 배려하며

더 이상 달라붙지 않는

임계점이 지난 조각에 대해

눈을 뜰 때나 눈을 감을 때나

아니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파뿌리처럼 늘어지는 피자의 점성을 간직하길 바라는 마음

 

먹고 살기 위해

새벽시장 인력 패 사람들과 입씨름을 하는 긴 시간 동안

피자는 조각마다 각각 다른 체온으로 입안에 들어가고

우리가 실제로 먹은 피자는 너무 굳어서

조금 녹아버린 빙하 같기도 하다

 

피자에는 빠른 시간이 산다

 

저녁은 늦게 오고

끈적하게 늘어지는 눈물이 조금씩 식어가는

접시 같은 네가

이제 슬프지 않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안이숲 시인

경남 산청에서 출생. 경상국립대학교 대학원 졸업. 2021년 《사사사》 신인상 수상하며 등단. 제11회 천강문학상 수상. 2023년 아르코 문학창작 지원금 수혜. 시집 『요즘 입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