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오 시인 / 광해, 그 뒤 외 6편
|
이원오 시인 / 광해, 그 뒤
강화의 위리안치된 적소謫所는 거세된 임금에게 과분할 수도 있겠다
탱자나무 가시울타리는 높아 서해바다를 볼 수 없으니 폐세자 부부는 인두와 가위로 굴을 팠다 일곱 척 굴은 세상으로 가는 통로였으나 아들과 며느리,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
그해, 병자년이던가 북방의 말발굽소리에 조정은 나를 제주로 보냈다
푸른 바다에 파도는 사나운데 탐라의 잘난 포졸은 영감이라 조롱하며 안방을 차지하고 나는 뒷방으로 물러앉는다 이 정도의 괄시는 참을만한 것이어서 허허 웃음으로 갈음한다 부지하는 목숨이 질긴다한들 마음의 위엄을 이길 순 없을 터
지존의 자리에 십육 년 유배의 세월은 십구년이니 죄인의 명이라 하겠다
내 눈물을 모으면 추자도를 삼킬 것이며 내 한숨을 토하면 한라산을 덮을 것인데
고국의 존망은 소식마저 끊기고 추상같은 실록의 기록이 두려울 뿐 안개 낀 바다 외딴 배에 몸을 싣는다
이원오 시인 / 늙어가는 길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가는 길은 몸이 마음과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그리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황혼의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보다 아름답다는 해넘이처럼. 그렇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이원오 시인 / 만리장성의 몽염을 생각함
저 긴 뱀의 몸통, 꾸불꾸불하다 지령의 힘을 안다면 이 뱀의 행렬을 멈추게 했을 것이다 만리장성을 쌓은 몽염! 최고의 장수였던 그의 무엇이 죄인으로 만들었나 '내 죄는 많고 많은 산맥의 지맥을 끊어서' 라고 최후 진술을 하였다 '왜, 백성의 고통을 끊지 못해서'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변명도 못하고 달게 형을 받는 것이다 뱀의 몸통엔 백성들의 피가 고여 있는지 지금도 간혹 신음을 뱉어낸다 꼬리는 길어 지금도 꾸불꾸불하다
이원오 시인 / 마이너리티
눈에 가리어 서러움을 받는 눈썹 얼굴이 변해가면서도 눈의 서체는 정자體를유지할 때 눈썹은 기울어진 흘림體다 마이너리티 어렸을 적 소원은 소재지에 사는 것이었다 면사무소가 있고 학교가 있고 오일장이 서는 그곳은 십리길을 걸어 다니는 아이에겐 꿈의 동네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시골출신이란 말은 간혹 망명객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어 투표권만이라도 사표가 되지 않도록 심사숙고를 하곤 한다 어느새 밀어버린 서러운 눈썹처럼 얼굴의 중심에 진입했다고 생각한 찰나 가정에서조차 밀려버리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침마다 산발體로 변해버린 눈썹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계간 <문예연구> 2015 겨울호 수록
이원오 시인 / 바람이 어보(魚譜)*를 엮다
유배는 바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곳까지 올 리 없다 유배생활은 바람과의 동거이다 귀를 창밖에 걸어둔다 바람의 정처(定處)는 창일 것이다 초가삼간의 빼꼼한 구멍에서 보는 뱃소리에 귀는 밝아진다 마음의 봉인을 풀기까지 이 바다는 버려져 있었다 온통 먹빛이었다
바람이 흑산의 어보(魚譜)를 엮었다 청어 배를 갈라 뼈의 숫자를 기록했다 바람이 핥고 간 뼈는 검다 상어 암컷은 태보가 둘이나 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간 탓이다 바람이 흑산의 어류들을 살게 하였고 비로소 물고기 족보에 올리게 되었다 죄인이 물고기의 배나 가른다는 비난을 혁파하는 것이 바람따라 온 뜻이다 흑산의 바람은 깊이만큼 검어 봉인을 뜯은 지금에도 그 지평을 보여주지 아니한다 대저 바람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나에 대한 혐의인가 봉인인가 깊이인가
* 손암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중에 지은 자산어보
-<시에> 2015년 가을호
이원오 시인 / 우물
아라비아의 철부지 항해사가 은하를 건너려다 실족하여 정박한 이곳은 폐쇄된 항구가 되었다
항구엔 비가 내리지 않는다 오로지 흘러들어야만 충만해 지는 곳 우물에 갇힌 항해사는 물로 뼈를 만들었다 뼈들은 부패되지 않는다
물의 뼈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물의 뼈들이 욱신욱신한다 물의 뼈들이 헤엄친다 뼈들은 우물에 넘쳐났고 우물은 뼈들을 불러 모았다 간혹 우물은 뼈들의 부식으로 탁해진다
우물을 마시려 하는 자와 우물을 비우려 하는 자 우물을 메우려 하는 자가 혼숙하고 있다
항해사는 허우적거리며 떠나지 못할 것이고 우물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정박한 닻은 이곳에서 뿌리를 내릴 것이다
나는 정녕 이 우물에서 무엇을 마실 것인가 독인가 약인가 정념인가
이원오 시인 / 발톱을 수선하다
무좀에 표백된 발톱을 손톱깎이로 자른다 발톱깎이는 없다 손톱에 밀려난 발톱 오만 여개가 넘는다는 글자 중에서 이름 하나 갖지 못해 손톱 조(爪)에 곁방살이를 산다 발톱의 표피를 무디어지도록 갈아낸다 신문의 행간에 조금씩 쌓여간다 발톱을 보여준다는 것은 당신의 폐부를 보여주는 것 당신의 전족纏足은 실은 발톱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데 발톱을 숨겼다니 이제 발톱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겨낼 때다 지금껏 살아온 불필요한 생애를 잘라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