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순 시인 / 그 물가에서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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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순 시인 / 그 물가에서
아파트 건너편에 늙은 버드나무 한 그루 나는 어쩜 이곳이 물가였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두꺼운 시간의 지층을 열어보면 그리운 물결들 찰랑찰랑 넘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저기 볕에 그을린 얼굴들 종일 붙박여 앉아 있는 저 벤치 아래로 큰 물가에서 버드나무 한 가지 물결 따라 떠밀려와 뿌리내리고 잎사귀들 푸르게 쏟아졌을까요 거뭇한 물풀 사이를 참붕어 버들치들 이리저리 숨고 서늘한 깊은 물에 마을 아낙들 풍성한 머리채 풀어 내렸을까요
저 주차장의 차들은 고삐를 매놓은 말이었을까요 누군가 저곳에 지친 말을 세워두고 담배연기 길게 내뿜다가 오래 간직해 딱딱해진 가슴속 그 무엇을 흘려보냈을까요 주름 속 흔적들 씻어내 물길 따라 보냈을까요
닫힌 현관문들 먼지 낀 창문들 늘어진 그네 베란다에 서서 축축한 빨래를 너는 여자들 떠다니는 소음들 속에 버드나무 저렇게 서 있네요
오래전 일들만 선명히 기억하는 노인처럼 철썩철썩 물소리 들을까요 쩔렁거리는 말방울 소리 깊이깊이 듣고 있을까요
-시집 <음표들의 집>에서
최기순 시인 / 발굽들
바람에 유리문이 닫히면서 은행나무 한 채를 끌고 들어왔다 비에 젖어 번들거리며 펄럭이는 잎사귀들 두 갈래로 갈라진 저 발굽들은 낯이 익다
발굽들을 앞세워 얼굴을 가린 그 배후를 본 적 없다 흰 갈기도 우아한 준마인지 혹은 半人半馬 황금소나기 메뚜기 떼였는지 다만 그 발굽아래 얼굴을 목덜미를 가슴을 내어줬을 뿐
장수한 거북이들과 만장일치의 깃발들 어린아이의 발자국들조차 촉수세운 혈관위에 통증 아닌 것들 없이 사랑할수록 더욱 사나워져서 즐겁게 당연하게 한 번 더 치명타를 먹이며 넘고 또 넘어오는 발굽들
춤추듯이 달려오는 수 천 수 만 의 저 푸른 발굽들
최기순 시인 / 그늘론
꽃에도 그늘이 있다. 말하자면 꽃은 절정이라는 것인데 백일홍 꽃잎 사이마다 그늘이 져 있다 어디에 몸을 드리우건 그늘은 생의 문양처럼 컴컴하다
처마 그늘이 어둑하게 덮여오는 집 마루 건너 방에 백지처럼 흰 얼굴이 누워 있고 아침마다 걸레 뭉치에 피가 묻어 나왔다
가을비 차게 내리는 밤 두런거리는 그림자 몇이 윗목에 웅크린 채 굳어버린 그늘을 거두어 오리나무 숲으로 갔다 불을 끄고 누우면 오리나무 둥근 잎들이 겹겹이 얼굴을 덮고 그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도 오금이 저렸다
그늘은 한 번 덮쳤던 것들을 쉽게 놔주지 않는다 유리 조각처럼 순간 빛나는 즐거움에 잊고 살았거나 또한 죽은 사람 이름처럼 잊힌 듯싶다가도 양산을 쓰고 꽃핀 거리를 거닐 때나 칼국수 한 그릇에 후줄근히 담 젖어 떠밀려 나오는 앞에
그것은 우연인 듯 나타나 햇빛의 일상을 단번에 엎어버리고 으슥한 그늘의 시간 속으로 종종 머리채를 끌고 들어간다
최기순 시인 / 복숭나무
싸리비 비스듬이 세워놓은 나무대문 아버지 짐 자전거 검은 끈이 어질러진 마당가에 그 복숭나무 있었다
미닫이 방문앞 툇마루엔 노란 양은 주전자 깨어진 굴뚝 납작해진 신발짝들 나나니 벌집의 작은 구멍이 촘촘한 기둥 아래 컴컴한 우물가 불룩한 배를 철사로 동여맨 항아리 옆에서 식구처럼 꽃피우고 열매 맺던 복숭나무
우리들 허기로 아득해진 여름 한 낮 진물흐르는 개복숭아 두어 개면 풍경이 바로 보이던,
지금은 엘지카센타, 프리미엄 부동산 옆에 찬찬찬 노래방 들어가는 입구 우리 집 없듯이 그 복숭나무 없다 복숭나무 따위 잊은 지 오래다
하필 오늘 켜켜이 매연 내려앉은 변두리 버스 정류장 길섶에 계절 내내 잊혀져 있다가 봄이라고 생뚱맞게 꽃을 피운 복숭나무
점점이 켜든 분홍 꽃불들 흐릿한 기억을 뚫고 게딱지처럼 납작한 그 집 단 번에 복제해 낸다
최기순 시인 / 라면이라는 곡선
문득 물결이라 불러본다 라면을 구불구불 흘러나오는 '사의찬미'를 라면이라 불러보다가 낭만주의는 위험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런저런 음식 값을 면밀히 계산해본 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긴 골목과 모퉁이를 돌아서 닿는 라면
라면이라는 게 뭐 입안이 쓸쓸해질 일인가 발자국을 옮겨 딛을 외나무다리가 없다면 면구스럽게 벌어진 허기를 어떻게 건너 갈 것인가
라면은 즐거운 선택이기도 하지만 선택의 여지없음이기도 한 것이다
중일전쟁 때 중국인들이 건면을 튀겨 가지고 다녔다는 기원설이 있는 걸 보면 막다른 목숨의 식량인 것만은 분명하다
니콜 키드만이 매력적이지만 애인은 아니듯 손닿지 않는 음식은 먹이가 아니다
가난한 연인의 곱슬머리에 코를 묻고 눈을 감듯 곡선의 따뜻한 면발이 고단한 하루를 지운다
최기순 시인 / 소
제 그림자를 보고도 뿔 세우고 덤벼들던 암소가 마두금 곡조에 눈매가 차분해지더니 굵은 눈물방울을 툭 떨어뜨린다
모든 사나움은 슬픔에 주둥이를 대고 있다 새끼와 생이별에 간을 베었던 것
우우우 몰려간 고깃집 성급하게 식욕을 돋우던 아름다운 치맛살은 말 못하는 몸의 곡진한 감정 결은 아니었을까
네 슬픔을 내가 몰라보듯 이번 생에서 우리는 엇갈렸을 뿐 우연히 마주치는 불행의 요철들을 나 또한 얼마나 피하고 싶었는지
-시집 『음표들의 집』에서
최기순 시인 / 아카시아
아카시아 만개한 골짜기 으슥한 그늘에 버려진 낡은 군화짝
흙 위로 반쯤 내민 탄피를 캐내어 장난감 대신 가지고 놀았다
삶은 감자 몇 알 밥 대신 먹고 중얼중얼 감자껍질을 벗기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봄날
---그해, 쌀가마니를 뒷 산 아카시아 나무 숲에 묻어놓고 피난같다 돌아오니 하나도 없이 다 퍼갔더라-----
그 후 앞 산을 뒤덮는 탐스런 꽃숭어리가 잃어버린 쌀이 되고 흰 밥덩이가 되는 꿈을 자주 꾸었다
하마, 그 때가 언제인데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커피를 마시다가도 아카시아 꽃향기 실려오면 옛날 그 봄에 갇혀 나 아찔하게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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