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권지현 시인 / 우주를 쪼개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7. 08:00
권지현 시인 / 우주를 쪼개다

권지현 시인 / 우주를 쪼개다

 

 

노랗게 여문 늙은 호박이

거실 한켠에 놓여 있는

신혼의 밤은 짧다

 

소한 대한 추위 다 보낸 저녁,

호박죽을 쑤려고 굳은 껍질에

식칼을 푹 찔러 넣는다

탱탱하고 부드러운 속살이

노릇노릇 익어 있겠지?

바닥 쪽까지 꽈악 쪼갠다

 

흙빛으로 색은 안쪽

씨앗들은 저마다 새순을 틔우고 있다

반투명의 벌레가

호박씨 새순을 흔들며 귀퉁이에서 기어나온다

제 몸 착실히 썩혀

거름 내고 벌레 키워

자가동력장치를 운행 중이었을까?

얼떨결에 신랑과 나는

불시착한 우주를 쪼개고 말았으니,

 

신혼의 밤도 황홀히 쪼개진다

 

 


 

 

권지현 시인 / 나이테 탁자

 

 

초록칠대문을 밀치니 머리채 늘어뜨린

붉은 줄장미가 마당을 내려다본다

 

삼형문 액자가 걸린 거실벽 아래엔

나이테 둘둘 감은 앉은뱅이 탁자가

무거운 몸을 비스듬히 누이고 있다

나무 밑둥 나이테는 깊었다

보랏빛 물양초를 가슴께 띄워놓고

소곤소곤 낯익은 소리를 흔들며 새기고 있다

두 팔을 나이테 돌아나간 회오리 위에 올리고

야생잎차를 마셔도 졸음은 밀려왔다

 

삐걱, 소리를 비집고 그는 돌아왔다

몇백 년을 조용조용 걸어 건너온 걸까?

일어나 앉으려 했지만 눈은 떠지지 않는다

이불을 덮어주고 그는 문을 닫는다

내처 잠들려 했을 때 시간은

멀찍, 비껴선다

 

손끝으로 훑던 오톨도톨 나이테를 긁는다

나무 귀를 당겨본다

나이테 안으로 까마득한 밤을 들여다본다

머리올처럼 가느다란 라디오 볼륨을 따라

방바닥을 미끄러지며 튀는 귀뚜라미 귀뚜라미,

 

훤해진 창을 새소리 두들겨대고

마르지 않는 수액 흐르던 길을 기억하는지

탁자에 엎드린 이마에 닿은 나이테,

서늘한 입맞춤이 몸속 구불구불 길을 뻗었다

 

 


 

 

권지현 시인 / 느티나무 따라왔네

 

 

우리는 주말부부다

두 주 만에 올라온 남편과 장보러 간다

길가에 씨앗 내놓은 종묘상 앞에 앉아

적상추 청상추 쑥갓 달랑무 얼갈이배추,

예닐곱 종도 넘게 주워 담는다

그 많은 걸 다 심을 셈이야?

 

딸에 맡아 기르는 장모님 드리겠다고

시골 텃밭에서 틈틈이 키운 풋것들을

남편은 몇 아름이나 싣고 와 풀어놓는다

적상추 청상추 쑥갓 달랑무 얼갈이배추,

친정엄마와 돌 지난 딸애까지 둘러앉아

채소장사해도 되겠다며 다듬고 앉았는데

아기가 척 집어올린 풀포기 하나

어, 느티나무가 다 딸려왔네

풋것들 속에 숨어들어 몰래 뿌리내렸을

아주 작고 여린 느티나무를 화분에 심는다

 

무성한 가지 밑에 평상 짜고 앉아

저녁거리 채소 다듬는 어깨에

초록그늘 일렁이는

느티나무 아래를 꿈꾼 적 있다

 

 


 

 

권지현 시인 / 양말

 

 

짝을 맞춰 개고나면 꼭

짝 없는 양말이 한두 짝은 나온다

그때마다 나는 현관 옆 맨 아래 서랍에

한 짝만 남은 양말을 넣어두고는 했다

언젠가 침대 밑이나 장롱 구석 같은 곳에서

제 짝에 맞는 양말이 나올 거라 생각하면서

 

빨래를 갠다 짝 맞춰 양말 정리를 하고 나니

또 한 짝만 남은 양말이 둘이다

혹시나 하고 현관 옆 맨 아래 서랍 열어보니

다행히 한 짝은 짝을 찾아 한 켤레가 되었다

모조리 꺼낸 짝 양말을 다시 넣으려다 세어보니

열여덟도 스물도 아닌 열아홉 짝,

 

한겨울에 신던 수면양말도 한 짝만 남았고

딸애가 좋아하던 딸기양말도 한 짝만 남았다

짝 양말을 잘라 인형옷을 만든 적 있고

짝 양말을 잘라 기름 닦을 때 쓴 적도 있지만

양말은 양말로 신을 때 양말답다는 생각,

 

장갑은 왼손 오른손에 맞는 짝이 있지만

양말은 왼발 오른발을 구별하지 않는다

왼 양말이었다가 오늘 양말이 되고

오른 양말이었다가 왼 양말이 된다

짝이 맞지 않지만 색이 비슷하다 싶으면

급할 땐 급한 대로 짝짝이 양말이 되는데

 

짝 없는 양말들을 이제는 그만

버려야겠다고 마음먹다가 현관 옆 맨 아래 서랍에

다시 집어넣는다 세상의 모든 짝은 짝이 있으므로

한 짝이 다른 한 짝을 기다리는 시간 속으로

 

 


 

 

권지현 시인 / 잘못 건드린 하루

 

 

 내부순환도로를 달린다 자동차 계기판에 불현 듯 떠 있는 붉은 등 'hold'

 

 경고등을 불안스레 끌어안고 한밤중 달리자니 얼굴인지 심장인지 분간 없 이 초조해진다

 

 다음날 정비업소에 차를 대니 정비사가 'hold' 버튼을 누른다 그냥 가시면 돼요 그만 가보세요 정비는 그걸로 끝이라는데

 

 잘못 건드린 하루는 off

 

ㅡ시에 2018 가을

 

 


 

 

권지현 시인 / 지도박물관

 

 

지도박물관 중앙 홀에서

세 살배기 딸애가 쉬를 싸고 문다

떼쓰는 아이를 안아올려 화장실에 다녀온다

외할머니가 바닥을 말끔히 닦아내는 중이다

어지간히 닦으세요

홀의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지도를 본다

 

지도 시뮬레이션을 다섯 살 아이에게 빼앗기고

휙휙 눈을 스치던 지구,

지구에 박힌 도시, 그 불빛 속에 그어진

그물 같은 길을 한정없이 따라 걸으려던 딸애는

미련이 남았는지 내 손을 잡아당긴다

 

연중무휴로 개방되는 지도박물관, 고산자 동상 쪽으로

흙담집 실금을 뚫고 나온 풀포기 자라듯

소나무에 덩굴을 치다 내려온 칡꽃이 기어간다.

오만분의 일 축척지도 밖으로 내달리는

떼쓰는 세 살배기 울음이 맨 처음 나선 길은

말랑말랑한 탄성, 이내 되돌아온다

 

길이 되려다 지도가 된 고산자 발치에서

자줏빛 칡꽃은 한참 길을 내고 있다

질긴 제 몸을 말아쥐는 덩굴손 사이로

달음질치는 아이의 신발끈을 고쳐 매어 준다

 

길 위에 선 사람들이 흩어진다

 

 


 

 

권지현 시인 / 홀드

 

 

 내부순환도로를 달린다 자동차 계기판에 불현 듯 떠 있는 붉은 등 'HOLD'

 

 경고등을 불안스레 끌어안고 한밤중 달리자니 얼굴인지 심장인지 분간없이 초조해 진다

 

 다음날 정비업소에 차를 대니 정비사가 'HOLD'버튼을 누른다 그냥 가시면 돼요 그만 가보세요 정비는 그걸로 끝이라는데

 

 잘못 건드린 하루는 OFF

 

 


 

권지현 시인

1968년 경북 봉화 출생. 국민대학교 국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06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0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재 국민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