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회진 시인 /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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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회진 시인 /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조선시대 시집간 딸은 명절이 오면 어머니와 반보기를 했다지 친정어머니가 반, 시집간 딸이 반 중간에서 짧은 만남 후 아쉬운 이별을 했다는 반보기
세상에서 이토록 간절한 말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내가 반을 가고 당신이 반을 오면 반이라도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너무 멀리 가거나 혹은 미처 이르지 못해 결국 만나지 못하고 당신과 나의 중간은 어디쯤인가 지도에도 없는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세상에서 이토록 슬픈 말
-시집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에서
강회진 시인 / 늙은 고향
어둔 숲 쪽에서 수리부엉이 울자 고라니 울음 풀쩍풀쩍 빈 마당 뛰어다닌다 배가 홀쭉한 길고양이들이 앙칼지게 울고 털 빠진 너구리들이 운다. 컹컹, 곤히 자고 있던 강아지 깨어 운다 소란스러운 밤 문 열고 마당에 나서니 눈 쌓인 앞산, 소나무들이 울고 있다 늙은 고향은 우는 것들 투성이 고향집 온도는 부모의 온도 점점 식어가는 고향의 온도 늙은 아비와 어미가 하루 종일 누워있는 방 반짝, 불 켜졌다 꺼진다 영원히 불 꺼진 방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강회진 시인 /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귀뚜라미 같기도 하고 여치 같기도 하고 초가을 밤 지리산 청령치쯤에서 들은 풀벌레 소리, 풀잎들 몸 비벼대는 푸른 소리 가끔 고향집 마당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 사립문 밖으로 사라지던 고라니의 뒷모습
무거운 돌을 덮고 가재처럼 모로 누우면 자꾸만 들리는 맑은 계곡 물 흐르는 소리 여름밤 보랏빛 도라지꽃 폭폭 터지는 소리 살얼음 속 보랏빛 노루귀 꽃대 오르는 소리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늙은 엄마는 내가 홀로 늙어가는 증거라며 신세학원이구나, 봄비처럼 중얼거려요
이명은 밤마다 나를 낯선 지명으로 데려다 놓아요 낮은 수척하고 밤은 짙으니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 없어요
귀를 길게 늘이고 나는 이제 봄으로 살기로 했어요
-시집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현대시학사
강회진 시인 / 야생부추
낮에는 구릉을 지나는 구름을 보았다 주인도 없이 양떼와 염소들이 구름을 뜯으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집주인 아들을 따라 찰랑찰랑 강물을 퍼 나르고 앞가슴에 말똥을 주워담았다. 살찐 구름들이 어둠을 품고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달 떠올랐다. 야생 허부와 야생부추의 알싸한 향기를 베고 뻥 뚫린 하늘 아래 누웠다. 무엇을 기다리는 지도 모르고 나는 이편에서 저편으로 흘러가는 별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초원을 가르는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무슨 슬픈 예감 같은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계간 『시와정신』 2013, 봄호
강회진 시인 / 나는 겨울만이 아닙니다
겨울나무는 마른 가지 속에 아무도 모르게 푸르른 눈 품고 있다 수많은 잎사귀 품고 있다. 나무는 스스로를 지키려 스스로를 견디며 눈보라 치는 들판에 잠시, 빈 몸으로 서 있는 것이다
강회진 시인 / 지실마을
지실 마을 가 자미꽃 되고 싶다는 그리하여 마당 한 켠 길게 뿌리내리며 살고 싶다는 한 사람 보았다 오늘은 네 살박이 아이 앞세우고 목백일홍 같은 그녀, 햇살 짱짱한 돌담 아래 해바라기 나왔다 아이와 함께 살 오른 희망을 모으고 있다 서울서 이사온 지 꼭 일곱달째 넓은 마당이 낯설기만 해 때로는 모아둔 햇살들 금간 벽 틈으로 우울하게 빠져 나가기도 하지만 지난 겨울 폭설속에도 마당 한 켠 비닐하우스에선 상추며 쑥갓들 그렁그렁 자라고 가만 보면 햇살들 꽃망울 부푼 매화나무 타고 내려와 모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이제는 제법 자란 잔뿌리들을 다독이기도 하는 것을 햇살 받은 그녀의 옆모습이 환하다.
강회진 시인 / 불영사(佛影寺)보름밤
천축산 별들 낮이면 자두나무 석류나무 찾아와 짙푸른 잎사귀들 되고 물오른 열매들 되어 눈 푸른 사미승 염불소리 들으며 속으로 속으로 깊어 갑니다 대웅전 한켠 자주달개비 하르르 눈 뜰때면 연못 안 빛나는 사금파리 되어 흐릅니다 그 빛 너무 맑고 환해 천축한 부처님도 슬며시 내려오고 풍덩풍덩 응진전 나한님도 들어옵니다 꽉찬 보름달 내려다 보고는 힘껏 입김 불어봅니다 순간, 후원 뜨락 늦도록 잠들지 못하던 날선 독사 한 마리 다독여 잠재우던 달맞이꽃들 한꺼번에 후두둑 피어납니다 한 순간 이었습니다 웽그렁웽그렁 月波위로 오랫토록 풍경소리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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