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원 시인 / 집에 대한 예의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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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원 시인 / 집에 대한 예의
사랑하라 긴 여행길에 오른 당신의 삶을
비바람 태풍에 끄떡없는 집을 짓는 까치도 제 몸보다 수백 배 큰 집을 짓는 개미도 기도하듯 만든 집에서 새끼 낳고 키우며 사랑 하나로 버티거늘 우리 삶에 사랑이 없다면 궁궐 인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사막을 걷는 낙타의 오아시스 같은 집 일을 마치고 해거름 돌아와 하루를 감사해 하며 내일이면 다시 못할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웃고 철없는 아이처럼 뛰며 살아 있음을 마음껏 즐거워하라 이는 집에 대한 당신의 예의
여행이 끝나는 날 마지막 휴식처 가장 편안한 무덤의 문을 열 때까지.
이길원 시인 / 나는 춤꾼
하회탈을 쓰고 춤을 춘다 뺨을 적시는 서러운 눈물 가슴에 흐르는 땀방울 모두 감추고 춤을 춘다 훔치고 싶었던 담너머 과수댁 그 음흉도 바짓가랑이에 묻고 하늘보고 더덩실 땅을 보고 화들짝 꽃이 피는 까닭도 새가 노래하는 이유도 하회탈 뒤에서 모른 척한다 시름이 먼지 되어 온몸을 덮어도 두 눈만 감추면 그만인 것 구경꾼은 즐거워 웃음을 날리는데 하회탈을 쓰고 춤이나 춘다
이길원 시인 / 감옥의 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다
우주의 중심은 나다. 내가 있어 가족이 있고 동네가 있고 모스크바가 있고 러시아가 있고 지구가 있고 우주가 있다. 러시아에선 케이지비(KGB)에 의해 - 동무는 체포되었소. -하는 순간 우주는 깨진 것이다. -A 솔제니친
겹겹이 철조망 하늘 길도 바다 길도 막힌 들 수도 날 수도 없는 감옥 나라 날마다 우주 깨지는 소리 요란한데 살아 숨은 쉬지만 세계는 두려워하는데 한민족이라면서도 남한만 모른 척 하는 북한
감옥의 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다
이길원 시인 / 늙은 대추
떫고 아리던 풋대추 비바람 태풍에 시달리다 한여름 태양에 붉게 몸 태우고 가을 서릿발에 오그라들며 알았네 삶의 절정이 지금이라는 것을
산등성이에 올라 세상사 굽어보듯 돌아보는 삶 밥알 넣어주기 바쁘던 품속의 아이들 떠나고 욕망 삼키고 야심 잠재운 늦가을 흐르는 구름처럼 평안하기만 한데 언제 지금처럼 평온한 날 있었나
이제야 알았네 쪼글쪼글 붉은 대추 속살 달콤한 연유를 나이 칠십에.
이길원 시인 / 아버지가 남긴 은행 몇 알에 대한 명상
바다에 이르자 비로소 잠잠해 졌다. 강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위도 흔들어보고 때론 흙탕물을 일으키더니
아버지는 이 산하의 강물이었다. 욕심 사납게 계곡의 쫄쫄 흐르는 물 모아 담지도 못하고 흘려보내는
흐르면서도 품에 고기들을 키웠다 끝없이 흘러드는 오수와 싸우며
갈라먹고 더럽히고 헤집다가 모두 떠났다 홀로 흘러갔다. 강은 등줄기에 노을 가득 걸어 놓고.
이길원 시인 / 천국과 지옥 -탈북 시인의 독백
두만강 넘을 때까지도 몰랐어요. 농가에 숨어들어 밭일 도와주며 얻은 쌀밥. 허겁지겁 먹을 때도 몰랐어요. 그런 우리 보고 "쭛쭛 제 백성 굶어 죽는데 제 배나 채우며 무기나 만드는 김정일. 나쁜 놈" 누군가 욕을 하면 "당신이 북에 살아 봤어요? 뭘 안다고 기래요. 우리가 못 사는 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는 미 제국주의 놈들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남조선 괴뢰 집단들 때문이지요. 우리를 보호하는 김정일 장군 왜 욕합니까?" 하며 대들었지요. 유치원 때부터 "장군님 만세"를 외치며 살아온 40년. 속았다는 걸 아는 데 3개월이 걸리더군요. 중국에 숨어들어 산 넘고 들 건너 2년. 남조선에 와 알았지요. 한반도에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는 걸. 그걸 나누는 금이 디엠지(DMZ)라는 걸.
수미산에 새가 운다. 새가 운다. 그도 목 놓아 운다.
-수미산: 불교의 우주관에 의해, 사람이 사는 세계의 중앙에 솟아 있다는 산.
-『미네르바』 2018-여름호
이길원 시인 / 시작하는 그곳에
바람쯤이야 싸늘하면 어떠냐 옷깃 여미고 하늘을 보자 남쪽 하늘 어디쯤 뜨거운 바람이 꿈틀대고 있지 않느냐
어둡다고 한탄하지 마라 태양은 매일매일 떠오르고 때마다 가슴엔 희망 또한 싹트지 않더냐 우리에게 절망이 있었다면 그만큼의 희망 또한 있었던 법
시작하는 그곳에 바로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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