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운지 시인 / 동백 외 7편
|
권운지 시인 / 동백
어린 투신投身을 놓고 말이 많았다. 저 붉은 결단은 분명 고막이 찢어지는 절규일터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곳곳에 불가청음역이 존재한다. 인정해야 한다. 소리에도 안과 밖이 있다는 것을 허공에도 장벽이 있다는 것을 붉은 소리를 들어올리는 두 손의 후회가 오래 아리다.
권운지 시인 / 기억
호두를 깨뜨릴 때 내가 당면하는 저항, 그것은 호두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호두는 제 스스로 껍질을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언제나 싸움이다. 너에게로 가는 길은, 호두알의 이쪽에서 느끼는 두려움, 나는 깨뜨리고 싶다. 껍질로 둘러싸인 것들만 보면 날카로워진다. 기억재생법으로 그는 나를 치료했다. 치료받는 사람은 모두를 말해야 된다. 단단한 봉합 속에 짓이겨진 시간, 응고된 핏덩이를 걷어내고 마침내 우리는 기억의 저편 희고 가지런한 골짜기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비어있는
권운지 시인 / 낙화를 따라가다
한 남자가 강물에 투신하였다고 아침 뉴스가 전한다. 뉴스를 전하는 화면 속으로 벚꽃 눈부신 봄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지나간다. 그 남자의 지난했을 생애가 간단명료하게 자막으로 처리 되었다. 낙화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작은 파문도 일으키지 않았다. 벼랑까지 떠밀려와 꽃잎처럼 몸을 날린 그 남자를 생각하며 나는 지금 그 화면의 봄 속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 남자가 남겼을 절절한 유서속으로, 환하게 꽃 핀 길은 분명 무엇인가를 숨기고있다. 해독이 어려운 은유처럼 햇살속에는 비밀스런 향기가 섞여있다. 어떤 향기는 잠결에 들은 고함소리 같다. 검은 껍질을 뚫고 나와 꽃들은 일제히 절벽에 매달려 있다. 미풍에도 꽃의 중심은 뜨겁고 소란하다. 여린 꽃잎에서 절벽을 들어 올리는 힘을 본다. 절벽 하나가 하르르 무너진다. 누군가 경적을 울렸다. 아찔한 어지러움에 나의 몸이 봄의 강물에 기울어졌다.
<시와 반시> 2010, 봄호
권운지 시인 / 중심
우수가 오기 전에 포도나무의 묵은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묵은 껍질이 감싸고 있는 벌레를 잡아내야 한다. 나는 이빨이 단단하고 입언저리가 붉은, 살 속 깊이 박혀 있던 그 벌레를 본 적이 있다. 벌레는 언제나 중심을 겨냥한다. 껍질에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내고 중심으로 들어가 가장 소중한 추억을 갉아먹는다. 중심의 불꽃을 갉아먹은 힘센 그 벌레는 수족을 마비시키고 실어증을 유발하다. 맥박이 느리고 식욕이 없는 것도, 제철에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도, 해마다 내가 봄앓이를 하는 것도 순전히 그 벌레 때문이다. 잘 벗겨지지 않는 거무죽죽한 마른 껍질을 찢어낸다. 섬유질처럼 질긴 날들이 먼지 파편을 일으키며 떨어져 나왔다. 저 어두운 협궤, 벌레가 파먹고 지나간 줄기는 터널처럼 속이 비어 있고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졌다. 벌레는 간곳없고 캄캄한 터널 속에 벌레의 검은 배설물 같은 시간들만 쌓여 있다
권운지 시인 / 낙엽에 부쳐
흰 젖과 눈물이 빠져나간 여자의 뼈는 이제 가볍다 달가락 달가락 소리가 날 것 같다 여린 바람에도 날아갈 것 같다 무한 천공 펄럭이던 고혹의 여자들이 낙하한다 서쪽 하늘 박모의 어스름 내리는데 연원을 알 수 없는 여자들 구릉에 모여 있다 한 허공이 또 한 허공에 겹쳐있다 일생을 매달려 펄럭이던 모든 문門의 열쇠를 돌려주고 그리움도 가쁜 숨결도 버려두고 맨발로 황급히 떠나온 저 허공의 전생을 향해 절한다 무엇이 그렇게 바빴는지 가을 찬바람에 유언도 없이 서둘러 떠났던 것이다
- 2014년 <시와 표현> 여름호
권운지 시인 / 침대가 환하다
별과 어둠과 사람이 은하를 이룬다. 은하는 중력 때문에 일그러지기도 한다. 중력 때문에 그의 등이 휜다. 그는 구부리고 잠을 잔다. 중력 때문에 자주 돌아눕는다. 알람 소리를 기억하는 침대는 집의 미궁, 침대는 그 집의 공전과 자전 주기를 기억하고 있다. 침대는 블랙홀과 가깝다. 금환일식이 지나갈 때면 길이 사라지거나 대상이 보이지 않는다. 등을 맞대고 누워도 사람 사이가 아득하다. 침대는 수면과 불면 사이를 오간다. 잠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잠 속에서도 뜨겁게 빛난다. 침대는 땀에 절은 그의 하루를 베낀다. 침대는 뒤척임의 파장에 예민하다. 침대는 몸의 언어를 해독한다. 한 주검이 침대 위에서 발견되었다. 저 고요한 은하, 침대가 환하다.
권운지 시인 / 천 개의 가면
어느 날 내가 없다 자주 울리는 전화선 속에도 선인장 가시 속에도 어제 읽던 책의 행간에도 없다 벗어놓은 외투와 손가방은 제자리를 지키는데 화장대 옆에도 컴퓨터 앞에도 싱크대 앞에도 없다 아파트 뒷문으로 난 산책길, 잠시 쉬어가던 벤치에도 없다 꼭 쥐었던 손을 어디에서 놓쳐버렸는가 기억의 실마리를 따라가 본다 지하철로 사무실로 반찬가게로, 다시 돌아와 식은 땀 흘리며 누워 있을 때 어둠 속에 줄을 선 낯선 얼굴들 정수리를 열고 안으로 들어온다 수시로 나를 데리고 나갔던 저 천 개의 가면들, 밤새 안에서 다툼이 인다
-시집 [갈라파고스]에서
권운지 시인 / 내 시의 에스프리
이제 접속은 불가피한 존재양식이다 정거장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식당에서도 접속은 이루어진다 고속도로에서도 골목에서도 가능하다 어디에서든 나는 부팅된다 도망갈 수도 없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온갖 담론들로 몸은 더욱 거대해지고 더러워지고 종속된다 플러그를 뽑으면 꽃들은 시든다 그곳에 사막은 발달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 인공의 호흡기를 떼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시와 반시, 7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