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주용일 시인 / 그런 사람이 있었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8. 08:00
주용일 시인 / 그런 사람이 있었네

주용일 시인 / 그런 사람이 있었네

 

 

목숨을 붇고 싶은 사람이 있었네

오월 윤기나는 동백 이파리 같은 여자,

지상 처음 듣는 목소리로 나를 당신이라 불러준,

칠흑 같은 번뇌로 내 생 반짝이게 하던,

그 여자에게 내 파릇한 생 묻고 싶은 적 있었네

내게 보약이자 독이었던 여자,

첫눈에 반한 사랑 많았지만

운명처럼 목숨 묻고 싶은 여자 하나뿐이었네

사내라는 허울 버리고

그 가슴에 생때같은 내 목숨 묻고 싶었네

생의 전부이자 아무것도 아니었던,

지금도 생각하면 기쁘고 서러운 여자,

나를 처름 당신이라 불러주고

내 흙가슴에 제 목숨 묻은 여자,

언젠가 그 여자에게 나도 내 목숨 묻은 적 있었네

 

-시집 <꽃과 함께 식사> 에서

 

 


 

 

주용일 시인 / 별

 

 

깊은 밤

깨어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하늘의 진신 사리

천길 낭떠러지 무서워 않고

어둠길 나서는 이의

가슴 어둠 환히 밝히는

 

 


 

 

주용일 시인 /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듯하다

 

 

빈터에서 누랗게 바랜 책들을 태운다

책장마다 깃들었던 태양의 날숨이

노랗게 토해진다, 불꽃 속에서

활자로 박힌 숱한 영혼의 흔적들이 날아오른다

찰나와도 같은 생의 마지막 길에서

활자들이 꼼지락거리며 뒤척이며

뜨거워라 무서워라 소멸로 가는 길을 묻는다

이승과 저승의 뒤바뀜처럼

검은 활자가 희게 되고 흰 종이가 검게 변한다

많은 정신들이 종이 위 검은 육신을 얻었다가

하얀 사리를 남기며 사라지고 있다

불꽃 주위로 아이들이 모여들어

벌겋게 얼굴 익히며 둘러선다

한때 세상을 풍미했던 정신들,

푸석이는 한줌 재로 감나무 밑거름이 될

불타는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듯하다

 

-시집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듯하다>

 

 


 

 

주용일 시인 / 아내의 손바닥

 

 

사랑이 다녀간 비 오는 봄밤

홍매화 벙글 듯 내 가슴에 화인(火印)이 찍힌 것을

아내는 눈치 채지 못한 것일까

내 마음의 공터에 비바람 몰아치고

빗물 고여 찰방찰방 발목이 젖고

한쪽 바닥이 뚫려 빗물이 새는 것을

아내는 알고도 모른 체 하는 것일까

언젠가 저에게도 물과 불의 싸움 같은

그런 사랑이 다녀갔기에

안쓰러이 질끈 눈 감아 주는 것인가

신열이 있으니 물을 많이 마시라는 의사의 처방은

눈물이 빠져나간 만큼 물을 채워 넣어야

몸이 과열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만

밤새도록 찻물 끓듯 마음이 보글보글 끓는다

사랑이 머무는 동안 나는 평화로웠다

마음이 사랑으로 고요한 동안

나의 자전과 공전은 순탄했다

사랑이 울고 간 봄밤,

벙글어 오르는 홍매화 한 송이가

가슴에 뜨거운 꽃무늬 화인으로 찍힌다

나는 돌아누워 잠든 아내의 가슴에

뜨거운 죄의 숨결을 묻는다

꿈인 듯 생시인 듯 생전의 어머니처럼

내 등을 토닥거리며 어루만지는

아내의 작고 여린 손바닥


 

 

주용일 시인 / 내 마음에 별이 뜨지 않은 날들이 참 오래되었다

 

 

별 밤, 아내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한다. 그녀도 처음에는

저 별들처럼 얼마나 신비롭고 빛나는 존재였던가.

오늘 저녁 아내는 내 등에 붙은 파리를 보며 파리는 업어주고

자기는 업어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린다. 연애시절엔

아내를 많이도 업어주었다. 그때는 아내도 지금처럼 무겁지

않았다. 삶이 힘겨운 만큼 아내도 조금씩 무거워지며

나는 등에서 자꾸 아내를 내려놓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가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나는

내 마음속에서 뜨고 지던 별들이며 노래들을 생각한다.

사랑, 평등, 신, 자유, 고귀함 이런 단어들이 내 가슴에서

떴다 사위어가는 동안 내 머리는 벗겨지고 나는 티끌처럼

작아졌다. 새들의 지저귐처럼 내 마음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노래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동안 내 영혼은

조금씩 은하수 저쪽으로 흘러갔다.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이루지 못한 꿈들이며,

가엾고 지친 영혼이며, 닳아버린 목숨이며, 애초에는 없던

가족, 집과 자동차, 보험금, 명예 이런 것들이 별이 뜨고 지던,

노래가 생겨나던 마음을 채워버렸다. 별이 뜨지 않는 밤하늘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노래가 없는 생을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았는데 그런 날들이 참 오래되었다.

 

 


 

 

주용일 시인 / 애기똥풀꽃

 

 

이쁜 애기를 집에 두고

밭일 나갔던 조선의 아낙이 저물녘,

종종걸음으로 들길 돌아오며 이름 붙였을 것이다

집 비운 사이,

애기가 풀잎 위에 노란 똥 싸놓았구나

무심코 중얼거리며 치맛자락 다잡으며

애기똥, 애기똥, 애기똥풀꽃 했을 것이다

홀로 있는 애기가 걱정되는 아낙에게

지천으로 피어 있는 노란꽃은 똥이 되고

애기똥은 꽃이 되었을 것이다

걸음마다 애기가 눈에 밟혀와

퉁퉁 불은 젖을 추스르며

세상에, 웬 꽃이 이리 사람 속을 태우는가 하며

애기똥도 이뻐 보인다는 아낙의 들길에

애기똥 닮은 그 꽃은 참 별난 꽃이었을 것이다

 

-시집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뜻하다」2003

 

 


 

 

주용일 시인 / 바닥을 친다는 것에 대하여

 

 

모든 수직이 수평으로 눕는

바닥은 세상에 널려 있지만

진정으로 바닥을 칠 줄 아는 이는 드물다

바닥을 슬픔으로 칠 때 통곡은 통곡다워지고

웃음은 뛸 듯한 기쁨이 되기도 한다

길바닥이나 지하도 바닥 같은

생의 밑바닥 깔고 앉아 뭉그적거려 본 뒤에야

바닥을 치는 일 무언지도 알게 된다

바닥 치고 일어서면

거기서부터 다시 길인 것도 알게 된다

물에 빠져 익사 직전 캄캄한 숨 막힘의 순간,

발바닥에 닿는 강바닥의 촉감에는

바닥을 친다는 것이

바닥을 차는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솟구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버려지거나 버림받은 것들이

마지막으로 이르는 곳이 바닥이지만

바닥이 없다면 호수는 하늘을 담지 못하고

우물은 목마른 이의 갈증 풀어주지 못한다

바닥은 낮고 평평해서 누구나 주저앉고 싶어

바닥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아니다, 결코 머무는 곳 아니다

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바닥으로 바닥을 탁 차고

다시 길 떠나는 곳이 바닥이다

 

-시집, <꽃과 함께 식사>, 고요아침, 2006

 

 


 

주용일 시인 (1964~2015)

1964년 충북 영동 출생. 한남대 국문학과 졸업.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듯하다> <내 마음에 별들이 뜨지 않은 날들이 참 오래되었다> <꽃과 함께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