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장석원 시인 / 빈방의 햇빛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8. 08:00
장석원 시인 / 빈방의 햇빛

장석원 시인 / 빈방의 햇빛

 

 

당신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흔들리는 모든 것들로부터

 

잘린 도마뱀의 꼬리

내가 간직한 당신의 일부

 

손가락을 남겨 두었어요

환해져요 몸피가 부르터요

 

햇빛 속에서 당신이 일렁일 때마다

나의 모서리 트더져요

 

당신의 얼굴 흐물거려요

벽에서 흘러내려요

 

푸스스 당신이 사라진다

아래로 스며든다

 

나와 당신, 합체 후

따스하게 차오르는 피와 빛

 

-시집 <유루무루> (파란, 2021)

 

 


 

 

장석원 시인 / 몽유

 

 

 자정에 뛰어내리기로 마음먹고, 환복하고, 지갑과 담배를 챙기고, 갈 곳이 있기나 한 것처럼, 내려선다, 착지까지 3초

 

 젖빛 하늘에 펄럭이는 그림자

 

 심야의 방문을 기다렸던 것처럼, 식탁 위에 매달려 있는 낮은 조도의 전등을 켜고, 술잔 두 개를 놓고, 술을 따라 주고, 작별 인사는 했는지 물어보고, 찾아온 이유가 그리움 때문이냐고 물어보고, 자고 가도 좋다고 말하고

 

 밝아지는 사람

 

 그러나, 체온이 너무 낮고, 결정적으로, 내가 없다는 것, 오래전에 깨졌다는 것,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나는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 사람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고 나는 버려진 것이었고, 그렇다, 절단, 한 발짝 더 나아가려 한다. 촛농처럼 머뭇거리는, 나는, 영원히 허공에 붙들린 자

 

-시집 『유루무루 (2021. 8. 파란)

 

 


 

 

장석원 시인 / 초록 전체주의

 

 

이우는 빛을 절단하네

 

오후의 눈부신 열광

시작되네 들개의 질주처럼

 

숲의 함성 폭풍의 끝을 갉아먹네

노을 향해 온몸 흔드는 유월의

나무 초록 심벌즈

바람의 숙주

 

진군하는

압박하는

침투하는

 

수혈하는

불태우는

 

초록 비산(飛散)

 

-시집 『유루 무루』 중에서

 

 


 

 

장석원 시인 / 문산

 

어둠에 손 넣으면 네가 만져진다

허공에 볼 대면 안쪽이 환해진다

견고한 늪에 붙들린 너

물컹한 대지에 물린 나

어느 날 나는 너를 발굴한다

바람이 데려온 너를 어루만진다

손이 기억하는 것, 몸

허공에서 너를 캐낸다

내가 너를 보면 너는 나타나고

내가 눈을 감자 너는 들어온다

내가 있을 때 너는

이곳에 있으려는 경향

너는 인조 피혁이 아니다

나는 너를 넘기고 너는 나를 뱉고

서로의 피조물들 달콤한 꿀꺽들

유리 상자 안에 갇힌

인간 동물원에 전시된

한 쌍 겹쳐진 우리를 바라보며

관음

썩지 않고 살아나는 밤의 불빛

등피 같은 흉곽 안에서

가물거리는 너

살갗에 닿는 너의 입술

같은 바늘 인두 그리고

아프지만 아프겠지만

그리고 지워지겠지만

지워지지 않겠지만

또한 슬픔과 그리움

나를 찾아오겠지만

망각과 회억의 상관관계 속에서

그날, 우리는 문산역 앞에서 짜장면을 먹고 복귀했다

그날, 우리는 문산역 앞에서 군번줄을 나눠 가졌다

 

 


 

 

장석원 시인 / 상호 의존적인, 경험, 물방울, 사람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삶도 돌아보지 않는다

경의선 가로등 열병합발전소 굴뚝 요진

아파트 후문부터 육교까지 미스터 트롯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다

불 켜진 마트

다리 벌린 다리의 다리

밑에서 보이던 다리들

自動

차를 삼키는 지하 주차장

퇴근하는 사람들의 어깨

인간적인 것들

얼마나 단단해졌는가

저 세계에 귀순하면

내가 고꾸라지면

나는 더 좋은 시민이 될 수 있을까

동의한다

 

- 『유루 무루』/ 파란, 2021.

 

 


 

 

장석원 시인 / 폴리리듬polyrhythm

 

 

 이슬비 부유하는 거리 잿빛 겨울바람 다가선다 사람들이 사라진다 눈 속으로 들어와서 호흡으로 증발한다 그들이 내게 말을 건다 나를 건드린다

 그들의 언어를 채집한다 그들에게 동화된다 나를 지운다 그들이 날 만들었다 날 태어나게 했다 거리에서 겨울 거리에서 뒤돌아본다 날숨만 남은 나는 낡은 허공이다

 

울 줄 아는 것

눈물을 참으면서 노래할 줄 아는 것

절망을 녹여 내는 것

끓는 저주를 사랑 위에 쏟아붓는 것

반드시 절제하면서

 

*

 

 어둠 속 너를 만난다 너를 사랑하고 아파한 나는 너를 너를 만들어 낸다 나는 너를 나는 나는 너를 만진다 저녁의 푸른 낯이 낯설다 낯설다 침묵과 고요와 고요와 휴식과 사멸을 음미할 시간이 시간이 다가온다 먼 먼 바람이 날 날 부른다 거기 누가 있을까 있을까 거기 누가 누가 날 부르고 있을까 길 끝에서 사랑을 기다린다 기다린다 나는 머무는 나는 머무는 음악 너의 눈빛이 날 만들었다 너를 잃고 우는 너를 잃고 우는 저녁 저녁이 내게는 아름다운 고통이었다 고통이었다

 

거리의 불길

도로에 흥건한 피

생존자들

죽지 않은 우리들

춤춘다

 

 네거리에서, 시장에서, 그대를 본다면, 다시, 그대를 만난다면, 그 거리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대에게 다다 르는 구름과 바람이 나 때문에 길 잃을 때, 멀리 떠나간 나는 돌아볼 수 없고, 서서히 썩어 가면서 노래하면서 할 수 있 는 일, 오로지 불패, 그대를 찾아 날아가는 나의 작은 새에게 나의 작은 절망에게 나의 차가운 사랑에게 밀려드는 불빛 앞에서, 그대를 잊었노라 그대를 지우노라 다짐하는데 한 그루 나무가 되는 나는, 지나는, 그대를 바라보는데 멀어지는 그대를 붙잡는 나는 나는 바람인데 그대를 물들이는 두려움 내가 실어 보낸 그리움 그대를 애무하는데, 그대는, 발갛게 달아오른 불빛, 그대, 실체 없는 기다림

 

 액체라고 말하는 순간 육체는 번만해지고 비중은 무거워지며 경도는 약해진다 나는 용해된다 액체가 된 내가 슬프다고 말할 때 바람은 좌우대칭으로 배열되고 내가 아프다고 말할 때 나의 어리석음은 액체가 나를 지운다 수면에 비치는 눈과 코와 입술과 귓바퀴 그리고 가라앉은 머리카락

 공포 쪽으로 움직이는 나의 액체

 

나는 마시는 사람이다

 

 몸 안에 맴도는 바람을 그대는 무엇이라 칭하는가 그대의 낮에 스며드는 나의 빛을 그대는 사랑이라 부르고 나 는 단절이라 말하지만

 빛나는 영혼은 멍들지 않는다 온몸에 시퍼런 눈동자들 그들이 만든 눈동자들 나를 휘둘러보는 그대 온몸에 이 파리 같은 핏자국 꺼지지 않는 나의 눈동자 불꽃

 

*

 

 사랑이 떠나갈 때, 실버들 늘어질 때, 그 사람, 지워진다 사라지는 그 사람에게 나는 명령한다

 

 돌아오라

 

 꿰뚫리기, 혼합되기, 움직이기, 귀갓길의 석양 속에서, 나는 갈라진다, 차갑다

 흔들리는 찻간에서, 창문을 세상의 눈이라고 여긴다

 그사람 지나갔다

 없는 사람을 있다고 생각하고 없는 그를 어루만지는 일

 

 거리를 흡입하는 대기

 내가 본 것은 껍데기

 결핍이여

 

 세계의 불변 속에서

 진리를 알고자 했으나 실패한 나는 괴멸에 대한 아지프로

 

 나는 존재한 적이 없고 나는 사랑의 주체가 된 적 또한 없다

 

*

 

 당신 빗방울, 고이는 당신

 내 몸은 당신을 담는 용기

 

 사랑도 당신도 넘친다

 

떠나라, 떠나라, 흘러가라,

거리를 지우고, 너머 너머로

 

-시집 「유루무루 (2021. 8. 파란)

 

 


 

 

장석원 시인 / 산중 횟집 더 모나크

 

 

츠끼다시

 

 바닷가에서, 포옹한 채, 사랑의 쓰나미를 지켜봤지. 당신과 나, 블로우 업, 블로우 雜ㅡ業 서로 날려버렸지 머리통을, 갈매기가 쪼아 먹었지, 눈알 네 개 먹이가 된 연인. 마지막에 삼켜버렸지. 소화하기 쉬웠어. 숨소리 지금도 들려오네. 소멸을 축하한다. 당신, 가스, 사라졌네. 사랑은 화생방 훈련이야. 모든 점막이 액체를 생산해 파도가 안에서 출렁거려. 다른 사람, 다른 메뉴라고 생각해. 도덕적 판단은 버려. 괜찮아 행복하면 된단다, 원생아. 이것을 우아하게 표현하면, 편달이라고 하지. 생살을 씹는 마음. 나의 맛. 나는 곤이처럼 부스러졌어. 돌아보지 마. 뒤에 있어. 조금 후에 끝날 거야. 파고가 낮아지고 있어. 입에 모래가 가득해 깊은 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웅크린 그날의 나이겠지. 기생, 하던 나를 꺼내줘. 해변의 눈부신 햇빛 속에 던져 줘. 내던져 놓은 불가사리처럼 슬퍼지네.

 

 

가이세키

 

 신록으로 무장한 나무들. 미쳤구나. 그리움 등나무처럼 얼크러졌네. 들판에 입술 댄 저녁의 해. 깨끗한 허공속에 그 사람의 환취 그윽하네. 과거는 환상. 송환된 포로의 기분. Mea culpa. 간장과 와사비. 무엇이 맛있는 것일까. 돌아서면 그 살 잊혀질까. 이리 오렴. 너의 이리를 빼 먹고 싶어. 무한한 사랑, 죽여ㅡ죽어버려. 귀를 만지던 사람. 뻐끔거리던 생선처럼 두려워서 눈을 냅킨으로 덮었어. 방글방글 웃으면서 내 살을 집었어. 국탕 속 참돔, 얼굴이 뭉개진다. 뒤에서 포옹하자 나는 푸석거렸지. 사랑하니까 주는 선물이야. 귓바퀴를 잘근거리면서 그 사람 힘껏 했지. 혀 위에 한 점. 쫄깃하고 탱탱하군. 더 먹겠다는 것 말리지 못했어. 이 쑤시면서 가는 사람. 나도야 간다. 저물자 그 사람 또 돌아오네. 사랑의 그라인더 잘도 돈다. 얼굴 위로 미싱 바늘 경쾌하게 지나간다. Hello, professor.

 

 


 

장석원 시인

1969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2년 《대한매일(현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하하는 것의 이름을 안들 睡蓮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아나키스트』 『태양의 연대기』 『역진화의 시작』 『리듬』. 평론집 『낯선 피의 침입』. 음악에세이 『우리 결코, 음악이 되자』. 현재 광운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 2008년 제13회 「현대시학작품상」, 2010년 제1회 「통영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