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오성인 시인 / 검은 고무신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9. 08:00
오성인 시인 / 검은 고무신

오성인 시인 / 검은 고무신

-섯알오름 학살터* 희생자를 애도함

 

 

이것은

살아서는 불리지 못할 이름 대신

남기는 증표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으로 향해 가는

군용트럭 짐칸에서 우리는

울음을 눌러 삼켰습니다

눈물의 뼈를 떼어

그 안에 영혼을 묻었습니다

눈물의 뼈를 떼어

그 안에 영혼을 묻었습니다

우리가 삼킨 울음이

집채만 한 파도로 돌아와 곳곳에 만연한

슬픔과 절망을 분쇄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꽃 핀 자리보다 꽃 진 자리가

더 처절하게 붉은 동백처럼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죽어서 산 자를 인도하는 일이 더욱 찬란합니다

하나 둘 난분분하는 검은 꽃잎

덮어지지 않는 뜨거운 이름들

 

*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오성인 시인 / 나무의 시절

 

 

전생이 나무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연히

손바닥을 뒤집었는데

 

한차례 견뎌왔던 시간들이 손가락 끝마다

나이테로 남겨져 있다

 

몹시 정적인 파문波紋

 

그 위에 고단한 누군가가 걸터앉았거나

바람에 등 떠밀려 불시착한 생이

정착해 새로 터를 일구기도 했을 것이다

 

화법은 주로 몸짓과 냄새와

색깔로 구분되었고

 

사람들은 잎사귀로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을 예측하거나 불확실한

사랑은 논했다

 

초록에서 노랑으로 노랑에서 빨강으로

 

이따금 마른 목과 썩은 발이 서로 엉키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손바닥을 쥐고 펼 때마다

나뭇가지들이 부딪치고 부서진다

 

나무의 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나무의 기억을 더듬는 나는

 

 


 

 

오성인 시인 / 잘 지내시지요

한동안 이렇다 할 소식 없이 비어 있던

옆집이 인테리어 공사로 소란스럽다

원래 살았던 집주인이 돌아온다는데

아저씨는 어디 가셨는지요 인상이

참 맑고 선하셨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이야기 나누면서 많이 웃다가 울었는데

아저씨도 잘 지내시는 거지요

내가 묻자 오랜만에 만난 아주머니가

시공하는 소리를 비집고 말해 준다

그럼요 아주 잘 지냅니다 그 사람

이제 영영 아프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을 거예요

화를 낼 일도 없고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않겠지요

하늘에 있거든요 코로나에 걸렸다가

후유증으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다시 집에 들어가서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보게 되면 이따금 생각날지도 모르겠는데

기억에 가둬 놓지 않으려고 정리 중이에요

쉴 새 없이 박고 칠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전기 기사였던 아저씨의 마지막 말처럼 들렸다

-시집 『이 차는 어디로 갑니까』, 걷는사람, 2023년,

 

 


 

 

오성인 시인 / 열쇠

 

 

아버지는 안에 있었지만

 

집에 들어가는 일은 녹록하지 않았다

늘 아버지는 굳게 잠겨 있었으므로

 

하루치 그림을

다 그리지 않은 엄마는 아직 멀리 있어서

 

나는 아버지를 열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언제부터 아버지는 잠겨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열 수 있나요

 

떨어져 있는 엄마를 대신해 네가

아버지의 낮과 밤을 그려 주어라

 

그러면 잠긴 아버지가 떠오를 거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는

해와 달을 그려 깊은 잠을 꺼냈다

 

그러자 그 속에서

천적에게 들키지 않으려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웅크린 아버지가 보였다

 

낮도 밤도 아닌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아버지를 위해

 

나는 깊고 안락한 구덩이

하나를 그렸다

 

그제야 아버지가 열렸다

 

 


 

 

오성인 시인 / 바닥에 대하여

 

 

할당된 몫을 비우고도 밥그릇

핥는 데 여념이 없는 개, 바닥 깊숙이

스민 밥맛 하나라도 놓칠세라

잔뜩 낮춘 몸

 

지금 그의 중심은 바닥이다

 

온몸의 감각을 한군데로 끌어모으는

나차웁고 견고한

 

모든 존재들은 낮은 데서 발원하나

 

생이 맨 처음 눈뜨고

마지막 숨들이 눕는

계절이 첫발을 내디뎠다가

서서히 발을 거두어들이는

 

최초이며 최후인 최선이거나 최악인

 

더는 낮아질 일도 붕괴될 일도 없는

낮은 벽, 혹은

천장

 

낮춘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무게를

동시에 겪어 내는 일, 혼신을 다해

희로애락애오욕을 지탱해 내는 일

 

그러므로, 나는

낮을 것이다

개의 혀가 밥그릇 너머의 피땀까지

닦아 내듯, 이생과 그 너머의 생까지

두루 읽어 낼 일이다

 

기꺼이,

바닥을 무릅쓸 일이다

 

 


 

 

오성인 시인 / 전복

 

 

화물차가 넘어지자 적재함에 앉아 졸던

맥주병들이 피 흘리며 나뒹군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운전자가 관자놀이 짚듯

핸드폰 버튼을 누른다

 

눈 감아도

잊히지 않는 실수들이

되살아나듯 몽글몽글

도로에 피어오르는 거품들

 

그런 적 있었다

 

누군가의 속을 뒤집어 놓고

기약 없는 어둠을 형벌로 받았던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고

남몰래 엎드려 울음을 삼켰던

 

손바닥을 뒤집을 때마다

너울거리는 죄책감

 

해초의 순한 마음을 닮고 싶었다

 

화물차는 넘어져 있고

만취한 도로가 맥주 거품 속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운전자가 전복처럼 엎드려 있다

 

 


 

 

오성인 시인 / 상한 깻잎장아찌*를 보며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다가

손길 뜸한 구석에 웅크린 깻잎장아찌 통을 본다

언제 담가뒀는지 까마득한 그것을 꺼내보니

먹구름 같은 곰팡이가 한가득 폈다

변질된 간장의 시큼퀴퀴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물에 젖은 나비의 날개처럼 힘없이 찢어지는 깻잎

숨통을 짓누르는 시간의 무게를 버티며 깻잎들은

혀와 닿는 순간만을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희로애락애오욕으로 잘 곰삭아졌을 그들과 몸을 섞은

혀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지듯 침샘이 폭발했을 텐데

미안한 마음을 담아 쓸어주듯 깻잎을

배수구 망에 담는다

마감을 앞둔 기자의 손놀림처럼 쏟아져 내리는

수도꼭지의 물줄기가 그늘진 깻잎의 생을

읽어 내려가는 것을 보다가 문득,

어느 무명 여 작가의 삶을 떠올린다

지독한 무관심과 굶주림 안에 방치된 채

희미해져가는 삶을 악착같이 붙들어 맸을 그녀는,

생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소금기를

머금으려 했던 깻잎처럼,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야속한 운명을 애써 외면하려 했을 것이다

채 숙성되지 못하고 잔등(殘燈)처럼 기로에 놓였던

당신들의 시간은 이제야

안녕을 향해 가고 있을는지

 

미약하게 남아 있는 소금기를 붙들며

그만 아프고 싶다 하는 깻잎을

달래듯 꾹 쥐자 고름처럼 짜여져 나오는 눈물

싱크대 안을 가득 메우던 울음이 점점 멎어져가는

부엌

 

* 故 최고은(1979~2011)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을 떠올리며.

 

-2013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오성인 시인

1987년 전남 광주 출생. 목포대 국문과 졸업. 2013년 《시인수첩》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푸른 눈의 목격자』. 2018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수상 : 나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