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허만하 시인 / 돌 하나 풀밭에 있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9. 08:00
허만하 시인 / 돌 하나 풀밭에 있다

허만하 시인 / 돌 하나 풀밭에 있다

 

 

돌 하나

 

풀밭에 있다

 

북극해 떠도는 유빙처럼

온도를 잃은 한때의 불덩어리.

 

풀밭을 걷고 있는

나는

 

달처럼

우주공간에 떠 있는

 

지구의 무게를 밟고 있다.

 

풀잎에 맺힌 한 방울

이슬

 

반짝이며

흙을 찾아 떨어지듯

 

나도 맨발이다

흙을 발바닥으로 만지듯

 

돌 하나

 

제 자리에 있다

 

자기한테서도 아득히

 

잊혀진 채

 

그냥

풀밭에 있다.

 

-계간 《예술가》(2024, 봄호)

 

 


 

 

허만하 시인 / 겨울 나그네

 

 

겨울바다는

하나의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무너지는 물결소리 잔잔하였다.

적막도 별빛처럼

맑은 것이 되는 남해 바닷가

물안개 수면 위를 다시 흐르고

갯내 묻은 바람소리에

가늘게 떠는 소나무 숲 그늘.

손바닥에 묻어 있는

보드라운 모래의 감촉.

고운 밀가루 같다.

몇 년 만인가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사흘 뒤는 입춘

떠나야 할 날이다.

어둠보다 진한 밤 속에서

옥색 물빛을 듣고 있었다

 

 


 

 

허만하 시인 / 목성에 강이 있었다

 

 

샤갈의 하늘에는 비가 내리지 않지만

갈릴레오의 시선이 머물렀던 목성에는

강물이 흘렀던 자국이 있다

 

실체가 없는 흔적이

먼저 실체가 되는

영하의 무기질 세계

 

부패성 물질이 없는

무기질 세계의 순수

 

아득함을 혼자서 흘렀을 물길

무섭다! 시의 길

 

 


 

 

허만하 시인 / 낙동강 하구에서

 

 

바다에 이르러

강은 이름을 잃어버린다

강과 바다 사이에서

흐름은 잠시 머뭇거린다

 

그때 강은 슬프게도 아름다운

연한 초록빛 물이 된다

 

물결 틈으로

잠시 모습을 비쳤다 사라지는

섭섭함 같은 빛깔,

적멸의 아름다움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커다란 긍정 사이에서

서걱이는 갈숲에 떨어지는

가을 햇살처럼

강의 최후는

부드럽고 해맑고 침착하다

 

두려워 말라, 흐름이여

너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리니

일곱 가지 슬픔의 어머니.

 

죽음을 매개로 한 조용한 轉身.

강은 바다의 일부가 되어

비로소 자기를 완성한다

 

 


 

 

허만하 시인 / 물질은 이유를 초월한다

 

 

 쓰러진 판자벽에 대못 하나 드러나 있다. 소임을 다한 대못은 혼자서 고요히 녹슬어 있었다. 비에 젖은 벽돌담 빛깔에 치자색을 섞어 산화철 고유의 겸손하게 아름다운 새로운 색을 빚어내고 있었다.

 

 물질은 흰 빙하처럼 직설적으로 순수한 것만이 아니다. 사막의 깊이가 저장하고 있는 검은 석유처럼 복합적으로 순수할 수도 있다. 물질은 이유를 초월한다. 일시에 쓰러진 초록색 양치류 숲과 매머드 무리의 마지막 은빛 울음소리가 범벅이 되어, 시간의 체온 안에서 석유가 되는 황홀한 물질의 변신을 보라.

 

 우리들의 영혼은 물질 밖으로 밀려나 낯선 나라 황산냄새 자욱한 광산에서 먼 낙조를 바라보며 울먹이고 있다. 물질이 되지 못한 언어와 언어가 되지 못한 물질 틈새에서 언어는 한정 없이 쓸쓸하다.

 

 우라늄은 증류수처럼 순수할 수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나팔꽃 우산 팽팽한 검은 천 위에 떨어지는 우라늄 빗방울 소리는 쓸쓸하다. 불붙은 은회색 우라늄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태양의 눈부심을 바라본 눈은 순식간에 눈멀고 사람은 나무 그늘처럼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새도 천사도 날갯짓을 잃어버린 하늘을 날개도 없이 날아다니는 방사능. 멸망한 미래의 원망이 번쩍이는 트럼펫 소리처럼 울리기 시작한 것은 사라진 목숨을 위한 진혼이 아니라, 사랑 없이 길들인 물질의 반란을 알리는 신호다.

 

 


 

 

허만하 시인 / 마지막 반전

 

 

 내복을 갈아입는다. 뒤집어진 내면이 바깥이 된다. 황갈색 위스키가 들어있을 때 투명한 술병 안은 그대로 안으로 있다. 술을 비운 빈 병에서는 안과 바깥은 경계가 없는 하나가 된다. 안과 바깥이 만나는 계면에 세계가 태어난다. 태어난 세계를 맨 먼저 느끼는 것은 나의 언어다.

 

 희박한 노을이 묻은 어스름이 내려앉는 강의 수면을 뛰어오르며 몸을 뒤집는 피라미의 은빛 번득임은 회전문처럼 안과 바깥이 하나인 것을 몸짓으로 말하고 있다. 논리의 반전은, 바로 눈이 시린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다. 우연을 모르는 논리의 엄정은 자기배신의 번득임으로 새로운 풍경을 펼친다.

 

 인간은 생면부지 죽음을 만나는 시간의 기슭에서 바람의 맨발에 밟히는 꽃잎처럼 최후의 반전을 이룩한다. 인간은 단 한 번뿐인 마지막 반전으로 누워서 그의 생을 완성하는 쓸쓸한 짐승이다.

 

 


 

 

허만하 시인 / 물질은 이유를 초월한다

 

 

 쓰러진 판자벽에 대못 하나 드러나 있다. 소임을 다한 대못은 혼자서 고요히 녹슬어 있었다. 비에 젖은 벽돌담 빛깔에 치자색을 섞어 산화철 고유의 겸손하게 아름다운 새로운 색을 빚어내고 있었다.

 

 물질은 흰 빙하처럼 직설적으로 순수한 것만이 아니다. 사막의 깊이가 저장하고 있는 검은 석유처럼 복합적으로 순수할 수도 있다. 물질은 이유를 초월한다. 일시에 쓰러진 초록색 양치류 숲과 매머드 무리의 마지막 은빛 울음소리가 범벅이 되어, 시간의 체온 안에서 석유가 되는 황홀한 물질의 변신을 보라.

 

 우리들의 영혼은 물질 밖으로 밀려나 낯선 나라 황산냄새 자욱한 광산에서 먼 낙조를 바라보며 울먹이고 있다. 물질이 되지 못한 언어와 언어가 되지 못한 물질 틈새에서 언어는 한정 없이 쓸쓸하다.

 

 우라늄은 증류수처럼 순수할 수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나팔꽃 우산 팽팽한 검은 천 위에 떨어지는 우라늄 빗방울 소리는 쓸쓸하다. 불붙은 은회색 우라늄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태양의 눈부심을 바라본 눈은 순식간에 눈멀고 사람은 나무 그늘처럼 그 자리 에서 쓰러진다.

 

 새도 천사도 날갯짓을 잃어버린 하늘을 날개도 없이 날아다니는 방사능. 멸망한 미래의 원망이 번쩍이는 트럼펫 소리처럼 울리기 시작한 것은 사라진 목숨을 위한 진혼이 아니라, 사랑 없이 길들인 물질의 반란을 알리는 신호다.

 

 


 

허만하 시인

1932년 대구 출생. 1957년 『문학예술』로 등단.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병리학 전공 의학박사. 부산고신대학 의과대학 교수 역임. 시집 『해조』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야생의 꽃』 『바다의 성분』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 등. <상화시인상> <박용래문학상> <한국시협상> <이산문학상> <청마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목월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