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유회숙 시인 / 시인을 만나다 외 8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9. 08:00
유회숙 시인 / 시인을 만나다

유회숙 시인 / 시인을 만나다

 

 

은유의 깊은 잠蠶에서 깨어나

두 손을 모은다

허공을 끌어당겨

그가 써 놓은 견고하고 둥근 시의 집

한 편의 시를 위하여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창가에 어둠은 마른 꽃잎으로

올올이 풀어져 허물을 벗는

아름다운 동행

그들이 둥글게 하나로 보이는 것도

한 편의 시가 우주임을 안 것도

그때였다

시간의 너울 그 너머

잘 빚은 허공이 눈부시다

제 몸을 다 비운 하늘벌레

가벼운 일상을 내려놓고

그의 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유회숙 시인 / 강물

 

 

맑은 날 눈비가 온다

푸릇푸릇 소리가 들린다

꽃과 꽃 사이에

물과 물 사이에

물과 꽃 사이에

길이 이어진다

물처럼 흘러서야

물처럼 누워서야

꿈처럼 다가오는 그대를

물살과 물살이 부딪는 소리

바람이 지나가며 흔들리는 소리

해와 달이 머물다 가는 소리

 

아름다운 경계

말없이 흐르는 강이 된다.

 

 


 

 

유회숙 시인 / 슬픔엔 모서리가 없다

 

 

문을 열다,

냉장고 안에 싹을 틔운

가슴 한 켠을 지그시 눌러본다

조금씩 껍질만 남아가는

겨울양파

가장 뜨거운 그늘에

어린 봄이 자란다

바라보면 너무나

작고 여린 것과

스러져 가는 것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돈다

산다는 건 어쩌면

어둠을 사르는 심지 끝에

점점 헐거워지는 모습

쓸쓸하고 따스한

오랜 슬픔의 집

그 집엔 모서리가 없다.

 

 


 

 

유회숙 시인 / 독도지도

 

 

나의 조국은 대한민국

나의 이름은 독도

 

물속 깊이 뿌리를 박고 움직임이 없나니

태극무늬 받침돌에 독도우체통 지표가 되고

핏줄인 듯 길을 따라 우편번호는 40240

 

그 길에 무궁화 피고

영희 철수 아버지 어머니

대대손손 혼불로 솟아오른 한반도의 영토여

 

대한민국 땅

세상사람 알고 있음에 내 오늘은

시의 언어로 진실을 토하는구나

 

신라장군 이사부도 천지간에 소리쳐

너희가 아느냐, 허공을 가르며

높이 손을 치켜들 제

 

불덩이 같은 태양

동해의 푸른 물 위로 낙관처럼 찍히었다

 

 


 

 

유회숙 시인 / 나도 봄

 

 

봄은

쉼표다

점 점 점

날아오르는

민들레 홀씨 같은 참새소리

하늘과 땅이 가까워지는

 

 ,    ,    ,   ,   ,

 산 들  강  풀  꽃

 

그 속에 나도

봄이다.

 

 


 

 

유회숙 시인 / 달개비꽃나비

 

 

날개를 펴고

거미줄에 오롯이 한 생이 저문다

계단을 오르다

바위 속에서 파르르 꽃잎 떨리는 게 보이고

수계식이 이어지는 법당 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의 너울이 탄다

저기, 깊고 하늑하늑한 적요

쪽빛바다를 물고 바다를 건너가는 나비

-시집 <국수사리 탑>에서

 

 


 

 

<2021, 제13회 불교문예작품상 수상자 대표시> 中

유회숙 시인 / 항아리

 

 

잘 익은 열매 같았다

어머니 손길에 반들반들 윤나는

항아리를 보며

저 단단한 껍질 안에 무엇이 있을까

를 생각한다, 생각은 멈추지 않고

항아리 뚜껑을 열려다

소중한 무게에 겁이나 궁금증을 덮곤 했다

겉이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무엇을 품는다, 로 읽혀진다

그때부터 둥지의 항아리

어머니 같은

꽃이 품은 자리에 청매실

뜨거움을 삭히고 매실 속 푸른 말들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그 경계에 떠오르는 향기 가득하니

나를 다 지우고 남은

시 한 편의 무게가 저렇듯 맛이 들어

항아리에

무엇을 품는다는 말엔 맑은 울림이 남는다

 

『불교문예』 2021-봄(92)호 <신작시>에서

 

 


 

 

유회숙 시인 / 텃밭에서 보았다

 

 

파꽃 위에

흰나비 앉았다

 

어렸을 때

엄마 머리에 꽃혔던

하얀 리본

 

오늘은

파를 다듬다 일없이 울었다

 

-시집 『국수사리탑』 ≪불교문예≫에서

 

 


 

 

유회숙 시인 / 우리 사이

 

 

가까워질 거예요

꽃이니까요

 

바람의 말씨를 떠올린다

 

 


 

유회숙 시인

충북 충주 출생. 한국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신인상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제도개선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편지가족 고문. 詩鄕 동인. 시집 『흔들리는 오후』 『꽃의 지문을 쓴다』 『나비1 나비3』 『국수사리 탑』. 서간문 『편지선생님』, 한국방송대학교 제4회 국문학상 '시부문' 수상. 우정사업본부장 표창, 지식경제부장관 표창. 불교문예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