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 시인(소하) / 바람의 약속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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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시인(소하) / 바람의 약속
울컥거리는 무언가는 하얗게 일어나는 기억이 잡아끄는 약속일 거다
그 언젠가 어느 길목에서 저만치 멀어져 간 강아지풀을 향수로 풀어헤친 내 머리를 어루만지는 바람도 어느 날의 약속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을 타고 휘어진 시간을 휘휘 저어가면 가슴에 남겨진 흔적도 바람의 약속이었다.
오늘도 추억을 기다리며 서성대고 있다 어떤 약속에 얽매인 채
이수진 시인(소하) / 고향의 봄
꽃향기에 이끌려 나섰다 보랏빛 들꽃이 향수로 피어나있다
담벼락 밑 쪼그리고 앉아있던 이야기가 민들레꽃이 되어 자리 잡았다
돌담 사이 양지 볕에는 아버지 지문이 묻은 지팡이가 외롭게 서 있다
대문 앞 제비꽃 엄마의 미소로 피어 봄을 알린다
집 앞 개울가에 봄볕이 첨벙첨벙 동심으로 돌아간 여인이 바지를 말아 올린다
강가 수양버들 물오르는 그리움
어머니 손잡은 아버지의 너털웃음이 노을로 내려앉는다
고향의 봄이 깊어가고 있다
이수진 시인(소하) / 방울꽃
댓잎에 매달려서 밤새워 숨죽이며
이슬 꽃 피우려고 새벽을 기다리다
운무 속 맑은 꽃 피워 햇살 품고 눕는다.
이수진 시인(소하) / 서해 바다
먼 곳 바라보니 숨가쁘네
머릿결 흩날리며 움켜쥔 바람
잿빛 갯벌 위에는 갈매기 끼룩끼룩
거칠게 물 차며 열정 불사르고
그리움은 샘물처럼 쏟아지는 자리 품기라도 하듯
애틋함 파헤치며 물속 가르네
이수진 시인(소하) / 도배
누런 얼룩을 걷어낸다 칼끝에 무너지는 먼지들 청소기 흡입구에 빨려 들어간다
벽 속에 숨겨진 동고동락의 몇 년 엿듣던 벽의 귀가 사라진다
거침없이 잡아채는 손아귀에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우르르 내려앉는 지난 시간들
싸늘하게 달라붙은 외로움이 한겹 벗겨지고
실금과 못 자국 벽이 지닌 상처가 드러난다
벗은 몸이 정직하다
이수진 시인(소하) / 그리움이라서.13
그대가 건네준 꽃바구니 시들 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을래요 향기는 소롯이 남은 채 내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요
이수진 시인(소하) / 봄비
너의 흔적으로 흥건하구나 누구에게 허락 받았니 이른 아침부터 쉬지 않는구나 창가 맺힌 것은 그리움의 눈물인가 추억에 턱 괴던 오후가 더 젖고 있다
이수진 시인(소하) / 인사동 골목에 시인이 산다
겨울이 문턱을 넘어오는 인사동 좁은 골목길
대형붓한 자루 획을 그어 세상에 휘장을 둘러놓고 가슴을 뛰게 한다
천상병 시인의 향수로 차를 우려내고 향기로 시밥을 짓는다
굽이치던 계절이 인사동 도랑으로 흘러들어 실개천 건너 강을 만들고
낮은 곳에 나를 세워 놓는다
오래전에 소풍을 마치고 돌아간 시인이 티 없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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