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나영순 시인 / 새의 역사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0. 08:00
나영순 시인 / 새의 역사

나영순 시인 / 새의 역사

인류 이전의 비행들

이름 없이도 날아간 부표들

순간에서 영원으로

허공을 할퀴고 지나간 발톱들

구름은 안 가 본 계곡이 없고

내려앉지 않은 언덕이 없다

아프리카는 아직도 지구인가

사자와 하이에나와 코끼리의 대륙에서

인도양에 뜬 난민들의 배가 기운다

총알의 이름으로 날아가는 비극들

살기 위한 삶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일 뿐

허공의 길은 참 멀고

깊다

집을 떠메고 이주하는 철새 떼가

실종된 난민들의 주소지를 찾아 날아간다

​​

-시집 『맹물은 뜨겁다』 (한국문연, 2021)

 

 


 

 

나영순 시인 / 열대야

옥상에 텐트를 치고 음악을 듣네

빙하와 설야의 밤

자작나무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오후에 잡아 온 연어를 굽네

얼굴은 뜨겁고 등은 시리네

당신의 지난 생이 그랬던 것처럼

 

여름이 있었네 구름의 날들

비 내리지 않는

사막의 시간들, 허공을 지나는

나그네 뜬구름에

문패를 내걸었네 여기, 지붕이 있으니

비 내리라고

 

이건 악몽이네

누가 적도로 이사를 왔나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서로를 튀기며 그래도 무사하다고

가을의 서늘함을 자랑하네

 

겨울 없는 계절을 거울에 비춰보네

어디로 가버렸는가 겨울은

거울 속으로 영영 사라졌는가

 

거울을 보네

겨울이 없네

 

봄 없는 음악

소멸을 노래하네

망가진 계절로 계단을 쌓았네

 

겨울비가 내리네 여름인데

눈이 내리네

 

대체 어디서 망가진 것인가

회귀를 잃어버리고

연어의 비망록을 불태우네

이제 어제는 내일이 없네

 

 


 

 

나영순 시인 / 맹물은 뜨겁다

 

 

맹물은 뜨겁다

 

포트의 물이 끓는다

딸깍, 전원이 끊기고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아직은 그냥 맹물

차 한 잔 마시려고

찻상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손잡이에서 포토의 온기가 만져진다

내 체온보다 한결 더 높게

단 한 번 끓어오른 물

아직은 투명하고

어떤 빛깔과도 섞이지 않은

저 말간,

머지않아 몸 안으로 스며들어

내 식은 피를 덥히고

숨을 고르고

그러고는 다시 떠날 기나긴 여정

맹물이 뜨겁다

 

생이 아직 식지 않았다고

드러난 바닥이 내게

뜨거운 숨소리로

말을 건넨다

 

- <현대시> 2022, 2월

 

 


 

 

나영순 시인 / 좌구산(坐龜山)

 

 

수염 긴 할아버지 한 분

산을 오르고 있네

철따라 비단 옷 갈아입는 멋쟁이

언제부터였는지

밤하늘 반짝이는 별, 그 영원의 글썽임들

한 발짝 더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게

은빛 천정 둥근 천문대 머리에 이고

지친 삶 부려 놓은 그대

하룻밤 편히 쉬어 가도록

이마 위에 팬션 하나 지어 놓았네

흘린 땀 고여 흘러 푸르게 출렁이는

삼기저수지 너머 장뜰도

속 깊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등 간질이는 그대의 발길

오늘도 기꺼이 허락해 주네

아, 거북좌(座)를 꿈꾸는 산신령 할아버지 거북

태고의 시간을 숨차게 디뎌 올라가고 있네

 

 


 

 

나영순 시인 / 체험박물관에서

 

 

옹알이 하는 아이도

허리춤에 책보 동여맨 어른도

찻잔에 뜬 참새의 혀로 시간을 읽습니다

이 소리들

두레 땅은 그대의 뜨락입니다

꽃이 피면

더 설레는 잎새들

남하리 노변을 서성이는데

부활은 불멸이라고

오늘은 한바탕입니다

이 바닥은

온통 그늘로 채워진 허공입니다

시간이라는 이름의, 불멸을 확인하는

 

 


 

 

나영순 시인 / 죽변항

 

 

어느 영화배우가 이보다

슬픈 영화를 찍을까요

이름 없는 여류시인에게

대죽울타리 길을 터주면

끼룩대며 반기던 갈매기 떼들도

낮은 비행으로 축포를 쏘죠

그물에 몸 다 내어 준

속살 비어가는 대게의 하루도

몇 시간쯤 포구에 누운 채

비린 냄새를 용케도 알아차리죠

죽변항을 찾아 또 하나의 봄을 삼킨

어지러운 동행자 이끌어

하트 모양 백사장 모래 언덕에

쉰 해를 싣고 왔던 시간들을 몽땅

파도 따라 이름 새겨주고

언덕배기 숨 고르는 사이에

길 묻던 관람객 되돌아가고 떠난 자리에는

휑하니 대죽소리만 사각사각 몸 부비고

백사장 모래에 새긴 등대의 눈물마저

또 한 컷 애절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겠지요

파도에 그림자 드리울 때면

맑은 물길 내어감을 하나도 거부하지 않고, 그저

품는 대로 찰랑찰랑 놓아주는 하얀 기억들을

안내자의 반환점 따라 기막히게

걸어 나오고 있겠지요

대나무가 해안을 버티는 마을에

갔던 적 있어요

 

 


 

 

나영순 시인 / 쥐코밥상 2

 

 

시간의 굴레 뛰쳐나와

나영순

처음 발길 닿은 줄 알았던 그곳 마당에는

지나던 길손에게 조촐하게 차려 내놓던

아낙네의 정성어린 따뜻한 밥상이 아니라

언제인지 알 수 없는 현대인인 빠빠라기인들의 이기심으로

콜라병 물고 맨몸으로 춤추던 부시맨들이 아닌

문명의 뒤꼍에서 마당 가득히

반쯤 줄어든 호수를 끼고

옷가지며 이불들이 널려 있는 세상으로

물 건너 산 너머 계절을 이고 은

커피의 별종으로 둔갑해

문 열 날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시인도 평론가도 그저 겉표지 화가가

함께하지 않은 걸 퍽이나 다행스럽다는 코짓으로

말문 막힌 풍경과 뒤통수 긁적이는 인사 나누고

뒤돌아서는 내내 겨울 털신 속의 무안함이

어찌나 하얗게 창백하던지

뜨거워진 발길 돌릴 수밖에 없던,

깊숙이 들어앉은 마을길 빠져나오는 데

세 계절이나 걸린 것을 쥐코밥상의 주인은

알고나 있을까

커피 향 진동할 때쯤 다시 찾으면

그때는, 마당 가득했던 빨랫감은 자취 감추고

쥐코밥상을 그리워하겠지

눈 내린 겨울 변방을 서성이면서

 

 


 

나영순 시인

월간문학(2012년)을 시작으로 작품 활동, 산문집 『시간의 잠』, 시집 『맹물은 뜨겁다』 『쥐코밥상』, 충북문예진흥기금 수혜. 청주시 1인1책 펴내기 운동 지도강사, 세계직지문화협회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