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영 시인 / 시를 베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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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영 시인 / 시를 베다
캄캄한 밤의 모가지에 잘 벼린 한 칼 긋는다 떨어지는 별들의 붉은 잔해 언어의 조각들이 도로에 머리를 박는다 질주하는 자동차가 밀고간다 쏜살같이 시는 베어졌다 그러므로 창백하게 아침이 올 것이다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고 김수영이 가래침을 뱉으며 기어 나올 것이다 현실은 풍자다 도적들이 신문의 활자마다 웃고 있다 자살하지 못하는 시는 그래서 베어져야 한다 목잘린 시들은 아파트 주차장 사이 빌딩의 엘리베이터 안을 배회해야 한다 기침을 하던 시인이 다시 기어 나오고 베어진 시는 떠돌아야 한다 흩날리는 자음과 모음들 찢긴 살점들 저 붉은 피붙이들
윤종영 시인 / 책의 맛
잘 차려진 글 밥상 앞에 앉으니 바라보는 눈만큼이나 생각이 깊어진다 빼곡한 책장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생각이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을 솎아낸다
분류기호 810번대 앞에 다다르자 입꼬리가 올라가고 생각에도 입맛이 돈다 무수히 꽂혀 있는 책과 책 사이에서 눈 맞춤을 기다리는 기형도의 시집 벌써 다섯 번째인데도 선뜻 꺼내지 못하고 망설인다
안개에 휩싸인 입 속의 검은 잎*을 넙죽넙죽 받아 잘근잘근 씹는다 씹을수록 고독하다 시어로 버무려져 숙성된 문장을 눈으로 떠먹는다 쌉쌀한 맛이 배어나 총총 박힌 별이 내 가슴에도 뜬다
빈집에 갇혀 시를 덮고 잠든 시인의 사랑을 지금이라도 꺼내주고 싶다 시인이 못다 이룬 청춘을 노래하고 싶다 문장을 묵독할수록 왕성해지는 아이러니한 식욕 행간의 의미까지 곱씹는다
켜켜이 껴안은 묵은 먼지를 털어내자 맛이 뭉근하게 배어난다 시 앞에서 그만 아득해진다 아이 기형도는 지금쯤 터벅터벅 시장에서 돌아온 엄마를 만났을까
비로소 사라지는 허기
-웹진 『시인광장』 2025년 3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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