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詩人에게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1. 08:00
최하림 시인 / 詩人에게

최하림 시인 / 詩人에게

 

 

공동묘지같이 외진 골짝에서 바람이 불고 바다가 일어

거리의 군중들이 몰려 갈 적에

또한 피와 아우성으로 돌바닥에 깔리고

밤우리에 감금 당할 적에

그대여 그대여 어떻게 저 먼 밤을 뚫고 가겠는가

바위속같이 캄캄하고 팍팍한 수십만리 길을

그대 홀로 어떻게 가 보겠는가

가다가 쓰러지고 피 흘린들

누가 염습이라도 해 주겠는가

괴로움이 비늘처럼 번쩍이면서 목을 조르고

마을 불빛도 모두 꺼져 어둠속으로 감겨들가는데

다만 살아 움직이는 바다여 바람이여

눈물 속에서 날이 서는 칼을 갈고 칼을 갈고

이파리 끝도 다치지 못하는 칼날을

그대의 심장에 겨누며

우리들은 끝없이 어둠으로 뻗어가는

그대의 길을 큰 눈을 뜨고 똑똑히 본다

 

 


 

 

최하림 시인 / 바람과 웃음

 

 

웃음으로 울음으로도 빈 하늘을 채우지 못하고 내리는

그림자들이 들을 달리면 싸리 이파리들은

붉게 타오르고 바람은 사방으로

반사하면서 날립니다

나도 반사 속에서 산길을

빠져나와 마을로 들어섭니다

마을길에는 한 사나이가 서 있고

사나이는 날아가는 바람을 보고

환하게 웃습니다

나도 웃습니다

하늘에는 아직 붉은 해가

반 남아 있고 가야 할

시간들도 널려 있습니다

 

-『불교신문/문태준의 詩 이야기』2022.09.26.

 

 


 

 

최하림 시인 / 아들에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들을 본다

아무 생각 없이, 고통스럽게

지나가 버린 시간들

다시 잡으려 해도 소용없는

시간 속으로 나는 되돌아갈 수 없으며

잃어버린 시간들을 다시 찾을 수도 없다

변해버린 사람과 깨어진 사랑

속에서 나는 걸음을 옮겨야 한다

남루한 저고리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물푸레나무 우거진 길로, 물 속으로,

이슬비 내리는 둑에서 나는 보아야 한다

세상이란 좋은 것이다

서로 잘 어깨동무하고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며 산다

비 내리는 둑에서

나뭇잎들은 푸르고

산색은 살아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슬픔 기쁨으로

밤을 걸어가고 가끔 불켜진

창을 올려다보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날이 깊어간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기억이 희미해지고 모든

사랑이 딱딱한 사물로 변해간다

내 손에서 따스했던 네 손이 사라진다

이제 나는 잃어버리게 될 시간들을

생각하고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물푸레나무가

우거져 있다 시간들이 우거져 있다

 

 


 

 

최하림 시인 / 봄

 

 

영화 20도를 오르내리는 날 아침

하두 추워서 갑자기 큰 소리로

하느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외쳤더니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은 공기 조각들이

부서져 슬픈 소리로 울었다

밤엔 눈이 내리고 강 얼음이 깨지고

버들개지들이 보오얗게 움터 올랐다

 

나는 다시

왜 이렇게 봄이 빨리 오지라고

이번에는 저넌번 일들이

조금 마음이 쓰여서 외치고 싶었으나

봄이 부서질까 봐

조심조심 숨을 죽이고

마루를 건너 유리문을 열고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봄이 왔구나

봄이 왔구나라고

 

 


 

 

최하림 시인 / 산수유꽃들이 피다 말고 떨어져

 

 

풍전등화같이 나라가 어수선할 때에도

봄이며는 매천 선생이 종자를 거느리고

왔다는 구례군 산동면 산위마을로

나는 근근이 와서 돌틈으로 흐르는

물 보며 우수가 저만큼 다가와 있음을

느낀다 성급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카메라에 봄을 담느라 바쁘고

빈집 놈새밭에서는 봄풀들이 돋아나

성하다 쉰을 넘었음직한 아주머니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 빈집 사려고

그러느냐고 묻는다 나는 웃는다 그런

나를 살펴선지 담장의 산수유꽃들이

피다 말고 떨어져 붉은 물

풀며 흘러간다

 

 


 

 

최하림 시인 / 아내에게

 

 

시간의 빗살들이 간단없이 흘러가던

성북역 철로변에 쑥니풀이 돋아나는 계절이면

고통의 씨앗들이 자라나 슬퍼지면서

우리는 언덕을 보았지 높고 둥근

언덕에서는 잡풀 향내가 코를 찌르고

가끔씩 파열음 섞인 아이들 함성이

하늘을 울리고 넘어가려 하는 햇살의

엷은 미소가 비친 이마에서

그림자들 넘실거렸지

나는 그 이마를 손등으로 쓸며

쉴 새 없이 입술을 댔다

손발을 가만히 쥐기도 했다

가을이 향기롭지요? 저기로 가봐요.

이리로 와봐요. 당신 손을 내 손에 얹어요.

우리는 손잡고 긴 길을 걸었지

긴 이야기했지

 끊어지려 하는 현의 떨리처럼

삶은 아프겠지만 서로가 제 자신의

아픔을 아파하고 아파하는 마음들이

기도가 될 때 안식은 찾아올 거예요

우리는 손잡고 계속 걸었지

누이 같은 여자여, 끊어지려 하는 목소리로

그대는, 그러나 노래하지 않았지

계속 보기만 했지

 

 


 

 

최하림 시인 /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안개는 물 위로 떠올라 강을

덮고 마을을 덮는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벌판 쪽으로 창이

하나 둘 열리고

나라들이 들어서고

저녁열차가 덜커덩덜커덩 언덕 아래로

쇠바퀴를 굴리며 지나간다 다시

안 보이는 벌판 쪽으로

창이 열리고

나라들이 들어서고

십일월과 십이월이 황사와도 같이

시계를 가리며 간다 모든 시간의

그림자들이 줄지어 간다 지상엔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했다는

허섭스레기 같은 소문들이 가득해지고

시청 앞 광장에는 오늘 밤도 촛불 시위가

계속된다 붉은 띠를 두른 전사들이

무어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외친다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안개가 물 위로 떠올라 강을 덮고

마을을 덮는 새에……

 

 


 

최하림 시인 (1939-2010)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본명 최호남.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조연현 문학상, 이상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 향년 7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