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오현정 시인 / 바다를 풀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2. 08:00
오현정 시인 / 바다를 풀다

오현정 시인 / 바다를 풀다

 

 

출렁이는 마음이 엎드려 절한다

홍련암 작은 사각의 공간에 사념을 밀어 넣으면

법당 마루 밑에 시퍼런 바다가 말한다

세상사 저렇게 철썩여야 옥빛도 본다

 

협곡의 바위에 스미는 의상대사의 기도소리

관세음보살의 현신은 푸른 새로 날아가

부신 물결 위에 홍련을 띄우고

여의주를 바친 용왕님과 더불어 불법을 듣는다

 

절벽 끝에 매달릴 때, 혼자 오면

대나무밭 바람소리 고스란히

내 것 되었다가 보내주는 무량의 신세계

붉디붉어 지워지지 않는 생의 서답 빨래

흐르는 물빛에 치대 햇빛에 건다

 

 


 

 

오현정 시인 / 벌거숭이

 

 

언제부턴가 구석에 움크리고 있던 너란녀석

난 널 애써 외면했다

많이 힘들고 외로웠을텐데

혼자서 잘 견뎌왔는데

굳이 내가 널 애써 외면했단다

너무도 잘 지내왔다.

지금도 너무 잘 지내고 있단다.

벌거숭이 네 모습을

이제는 보련다.

사랑으로 보듬어 주련다.

 

괜찮다.

잘했다.

사랑한다.

 

 


 

 

오현정 시인 / 대출

 

 

당신과 함께 라면 성공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 험한 세상 조금은 쉬울 것 같았습니다.

두렵고, 망설였지만.

여기저기서 먼저 손 내밀어 주며

함께 하자고

한번쯤은 함께 하는건.. 나쁜게 아니라며

저에게 손 내밀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라면 제 꿈을 금방 손에 쥘 것 같았습니다.

당신을 만난 그때를 떠올려보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나도..

 

당신을 만나고나선.. 어떻게 이별해야 할지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감당이 되질 않습니다.

 

당신을 만나니. 매달 매달 의무가 생겼습니다.

당신과 헤어지기 전까진 벋어날 수 없는.

 

이제는 당신과 헤어지고 싶습니다.

당신과 헤어져 당당히 스스로 일어 서고 싶습니다.

 

하지만, 첫 만남보다 헤어짐이 더 어렵네요.

 

 


 

 

오현정 시인 / 샹그릴라

앞에서 당긴다

화내는 대신 유머를 던진다

잠잠한 안개에게 돌발퀴즈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유를 풀어낸다

절벽을 오르면 바람도 구름도 신발을 벗어들고

말귀를 전하려 쫑긋, 귀를 세운다

무거운 무망감이

살아 차오르는 달을 이고

바람의 야생화에게 묻는다

오색 빛 해를 누리는

골짜기 비가 대답한다

누강을 건너 잠 못 드는 이마

그대의 각도는 사뭇 다르다

파종을 위해 멀티스태킹이 되는 쉼터의 달빛이다

기울지 않는 푸른 보폭의 샛별이다

 

 


 

 

오현정 시인 / 절차탁마切磋琢磨의 달

 

 

아무리 신이 나도

아무리 낭패 중이라도

시간의 궤도를 수정할 수는 없다

 

나도 먼지 그대로 먼지로 돌아간다

불이었던 나, 흙으로

바람이었던 그대, 강으로

비늘 떨구며 은하수 건너간다

 

먼지보다 작은 별이 되어

곤고困苦한사람

심신의 방에 영혼의 심지 돋우러 간다

 

비교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가장 못난 나의 돌을 쪼개면

 

우주에 반사되어 물든 나무 위에 걸리는

저 밝음

아린 빛, 둥글어진다

 

 


 

 

오현정 시인 / 솜꽃역(驛)

 

 

양떼구름을 바구니에 담는다

몽실몽실한 저녁을 위해

종착역에 닿기 전엔 아무도 알 수 없는

솜꽃이 아침, 아침 핀다

 

빛과 그늘이 두툼해지다

철로 길을 바퀴 바퀴 걷는다

하늘과 땅에서 기적이 울 때

하얀 사람은 온다

 

솜꽃세느라 젖은 차표가

기찻길 앞 나무의자에서 쉬는 동안

인생열차 칸에

아지랑이 솜, 솜 피어오른다.

 

 


 

 

오현정 시인 / 길가메시*를 굴리다

 

 

앞산의 또렷또렷한 나무

쭈뼛쭈뼛 따라오다 너였어, 눈 맞추면 쑥스러워 해

허리 구불구불 허공을 파고드는 붉은 황장목이다

 

할 말은 천진천 물길

무심한 돌이 감당할 속도를 안다

 

술렁술렁 바람결을 잡는 여간내기가 아니다

뭉게구름과 실바람을 휘감는 거리가 얼마나 먼지

소나무 숲 해먹 위에서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궁구 중이다

눈앞이 노래질 때 송화 바람은 내일을 다 안아 올리기 벅차

그늘을 아우르고 해를 밀어 올려

햇살나무들이 노곤한 두 다리를 펴는 저녁에 솔잎별을 띄운다

 

하늘을 접목한 나뭇가지는 마른 씨앗을 적시고

솔향은 은은한 불멸의 날개를 품는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서사시에 나오는 주인공.

 

 


 

오현정(吳賢庭) 시인

1952년 경북 포항 출생. 숙명여대 불문과 졸업. 1978년, 1989년 『현대문학』 2회 추천완료로 등단. 시집 『지금이 가장 좋은 때』 『몽상가의 턱』 『광교산 소나무』 『고구려 남자』 『에스더 편지』 『물이 되어, 불이 되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하여』. 등. 한국문협작가상, 애지문학상, 김기림문학상대상 등을 수상. 숙명여대 취업경력개발센타 문예창작 강사 역임, 한국문인협회 이사 역임. 계간 『시산맥』 『시와문화』 『착각의시학』 편집자문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시인협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여성문학인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