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루 시인 / 눈과 귀가 사방에 열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2. 08:00
김루 시인 / 눈과 귀가 사방에 열려

김루 시인 / 눈과 귀가 사방에 열려

 차들은 도로에 갇혀 꼼짝을 않는다

 전화벨은 수없이 노래를 부르다 잠잠해진다

 잠잠한 시간이 길면 초조한 마음은 경적을 울리고

 답가라도 하듯 차들은 여기저기서 빵빵거린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이 떨린다

 떨린다는 건 징조다

 희뿌연 병동에서

 면회를 기다리다 벽에 귀를 걸어둔 당신은 눈을 감는다

 벽속에 쟁여 둔 슬픔이 얼룩져 박힐 때

 하늘에 구멍은 숭숭 뚫리고

 검은 밥상으로 아기새, 날아든다

 새가 운다

 새가 사람 목소리로 운다

 우는 소리에 눈과 귀가 사방에 열린 당신은 백합이었다가 폭우였다가 뼈가 앙상한 반가사유상으로 앉아

 올망졸망

 바둑돌처럼 앉아 코를 훌쩍이며 우는

 미우새

 등짝을 후리치며

 손톱 달을 꺼내 국수를 민다

 손은 깊고

 손은 넓어

 먼 곳의 사람들도 엄마손은 약손

 손을 따라 밤을 휘적거리면

 뭉그러진 엄마

 속을 휘젓는 것 같아*

 가늘고 긴 2월 밤이 툭툭 끊긴다

​​

*신용목「국자」에서 발상

 

 


 

 

김루 시인 / 공원의 표정

 

 

우리는 셋이 되어 공원을 걷지

셋이라는 건 모두 혼자인 거야

 

저녁 산책이 밝아졌다 어두워진다

 

팔짱을 낀 연인을 지나 장미정원을 지나 풍차 앞에서 구름다리에 오른다

 

우리는 걷다 웃고 웃다 반성한다

 

날씨를

공원을

혼자를

우린 왜 셋이면서 혼자인 걸까

 

자전거를 타며 웃는 연인으로 출발해도 좋았을 걸

 

강아지가 온다 하얗게 온다 혀를 내밀며 정겨운 꼬리로 온다

 

가까이 더 가까이

 

충혼비 앞에서 우리는 선다

 

여기엔 거미뿐이구나

 

거미가 한 발 한 발 발등을 딛고 올라와 묵념한다

 

허공에서 노을 지는 아버지

 

우리는 다시

셋이 되어

바람의 몸속에 들어앉는다

 

너무 깊게 들어온 걸까

 

죽은 아버지가 따라오다

 

붉게 일어난다

 

밟고 있는 그림자가 무덤이었구나

 

검은 옷을 입고

저마다의 숲으로 우리는 흩어진다

 

- 시집 『오늘의 판타지』에서

 

 


 

 

김루 시인 / 밤을 걷는 킬힐

 

굽 높이에 밤은 달라지지

 

밤의 문을 열고

킬힐은 밤을 걷지

콘트라베이스의 울음으로

유리 구두는 반짝이고

사이프러스처럼 자라나는 심장은

뜨거워지지

굽 높은 밤은 당당해

 

춤추던 밤의 계단을 내려서면

보조개는 검은 밤으로 피어나지

 

언제 웃어본 걸까

 

아스라한 집이 가까워지면

지하 방은 어둡고

태양의 그림자만 밟는

문은 열수록 회색빛이지

 

밤은 왜 낮은 곳으로만 걸어갈까

 

반짝이는 킬힐을 신어도

버클슈즈를 신어도

곰팡이가 피는 지하 방

집에서 멀어질수록 그녀 발자국 소리는 리듬을 갖는다

 

 


 

 

김루 시인 / 비요일의 우산

 

 

구석에 오래 세워져 있습니다

날씨가 맑았거든요

 

오늘은 아침부터 흐리더니

빗소리 저녁을 두드립니다

 

뜨거워지는 빗방울 소리에

밖으로 나갑니다

 

모처럼의 외출입니다

 

슈만 환상곡이 밤거리를 우주로 밀어올립니다

거리를 감싸는 빗소리

횡단보도에 멈춰서 비를 바라봅니다

 

횡단보도는 파란 불빛으로 바뀌고

비의 건반은 펼쳐집니다

손을 맞잡고 비를 연주합니다

 

비의 음악이 심장을 파고들어

빗방울 속으로 우리는 숨어듭니다

 

해가 뜨면 다시 구석에 서 있겠지만

태양을 그리워하지 않을겁니다

빗소리 기다립니다

 

 


 

 

김루 시인 / 혼자였던 걸음이 가장 긴 사색으로 합장하는

- 옥전 용봉문 환두대도

 

 

바다에서, 스무 명의 사람과 수 만 번의 비명이

하늘에서 내려온 운명의 사람을

파도의 음표로 그리며 안녕

 

펼쳐놓은 지도도 없이

붉은 돛을 올리고

붉은 뺨, 붉은 시간을 물결쳐 오르면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던 검이 순간, 빛나고 있지

 

무덤은 기다림이었을까

 

차오르는 달을 심장이라 부르며 이 천 년을 견뎌온 검의 눈빛

 

휘어지지 않으면 부러진다는 걸 알면서도

죽은 자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용의 문신을 하고

승천을 거부한 검의 눈빛은

검푸른 빛을 잃지 않는다

 

지워진 사람처럼

지워진 이름처럼

 

-2024년 구지가문학관 건립추진을 위한 콘텐츠 “가야로 세계로” 문집 中 초대시

 

 


 

 

김루 시인 / 오늘의 판타지

 

비가 오면 인쇄소는 검고 활자는 지루합니다

 

카탈로그에 새를 풀어요

 

빗줄기에 갇힌 새들이 비를 저으며 구름이 되어갑니다

 

구름이 되어 본 사람만이 비의 목소리를 가집니다

 

처음 본 새에게 길을 물어요

 

정류장에 빗소리 쏟아지고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 않습니다

 

한 세기를 건너듯

한 정거장을 건너면

 

빗소리 깊어집니다

 

비를 오래 바라본 새들이 태양을 알아봅니다

 

기다리던 버스를 물고 바다를 건너오는 새

 

빗소리 깊어집니다

 

-시집 『오늘의 판타지』에서

 

 


 

 

김루 시인 / 카페에서 바라본 여름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 당신은 여름을 주문한다

 

여름이 준비되었습니다

여름을 건네자

유리잔에서 당신이 출렁거린다

 

날은 덥고 날은 습하고 습한 여름이 천장에서 허브 향

을 키우고

 

물수국은 해변에서 하얗다

서핑 하던 사람들

물갈퀴를 끼우고 바다를 헤엄쳐 다니면

잠깐 비가 내리고

 

바닷속 물고기는 줄무늬를 갖는다

 

천 개의 입술과 천 개의 지느러미로 헤엄치는 바다

 

바나나 보트가 구름 속을 달릴 때

 

당신의 집은 비어 있다

고장 난 피아노 위에 놓인 바다

 

흑백의 얼굴로 여름을 지나고 있다

 

-시집 『오늘의 판타지』에서

 

 


 

김루 시인

2010년 《현대시학》 21회 신인상을 통해 등단. (본명: 김성순). 2021년 울산문인협회 올해의작품상, 2022년 제2회 구지가문학상 수상. 시집 『오늘의 판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