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시인 / 가장 사나운 짐승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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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시인 / 가장 사나운 짐승
내가 다섯 해나 살다가 온 하와이 호놀롤루시의 동물원 철책과 철망 속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동물과 새들이 길러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것은 그 구경거리의 마지막 코스
"가장 사나운 짐승"이라는 팻말이 붙은 한 우리 속에는 대문짝만한 한 큰 거울이 놓여 있어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찔끔 놀라게 하는데 오늘날 우리도 때마다 거울에다 얼굴도 마음도 비춰 보면서 스스로가 사납고도 고약한 짐승이 되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구상 시인 / 노부부(老夫婦)
아름다운 오해로 출발하여 참담한 이해에 도달했달까!
우리는 이제 자신보다도 상대방을 더 잘 안다.
그리고 오히려 무언(無言)으로 말하고 말로서 침묵한다.
서로가 살아오면서 야금야금 시시해 지고 데데해 져서 아주 초라해진 지금 두 사람은 안팎이 몹시 닮았다.
구상 시인 / 그리스도 폴의.60
한 방울의 물이 모여서 강이 되니 강은 크낙한 한 방울의 물이다.
그래서 한 방울의 물이 흐려지면 그만큼 강은 흐려지고 한 방울의 물이 맑아지면 그만큼 강이 맑아진다.
우리의 인간세상 한 사람의 죄도 한 사람의 사랑도 저와 같다.
-시집 <그리스도 폴의 강>에서
구상 시인 / 마음의 구멍
내 마음 저 깊이 어디 한 구멍이 뚫려 있어
저 허공과 아니 저 무한과 저 영혼과 맞닿아서
공空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그곳으로부터
신기한 바람이 불어온다. 신비한 울림이 울려온다. 신령한 말씀이 들려온다.
나는 어린애가 되어 말 이전의 말로 이에 응답할 제
온 세상 모든 것이 제자리서 제 모습을 하고 총총한 별이 되어 빛을 뿜으며
나는 나의 불멸을 실감하면서 삶의 덧없음이 오히려 소중해지며 더없이 행복하구나!
구상 시인 / 오늘서부터 영원을
오늘도 친구의 訃音(부음)을 받았다. 모두을 앞서거니뒤서거니 어차피 가는구나.
나도 머지않지 싶다.
그런데 죽음이 이리 불안한 것은 그 죽기까지의 고통이 무서워설까? 하다면 安樂死(안락사)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두려운 것은 죽은 뒤가 문제로다. 저 세상 길흉이 문제로다.
이렇듯 내세를 떠올리면 오늘의 나의 삶은 너무나 잘못되어 있다.
내세를 진정 걱정한다면 오늘서부터 내세를, 아니 영원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구상 시인 / 부활
죽어 썩은 것 같던 매화(梅花)의 옛 등걸에 승리의화관(花冠)인 듯 꽃이 눈부시다.
당신 안에 생명을 둔 만물이 저렇듯 죽어도 죽지 않고 또다시 소생하고 변신함을 보느니 당신이 몸소 부활로 증거한 우리의 부활이야 의심할 바 있으랴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
봄의 행진이 아롱진 지구의 어느 변두리에서 나는 우리의 부활로써 성취될 그 날의 누리를 그리며 황홀에 취해 있다.
구상 시인 /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27
6.25, 그날의 경악과 절망을 맛본 사람은 지구의 종언(終焉)을 맞더라도 덜 당황해 하리라.
하룻만에 패잔병의 모습으로 변한 국군과 함께 후퇴라는 것을 하며 수원에서 UN군 참전의 소식을 듣고서야 노아의 방주를 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전에서 정부부대 정치반원을 배속되어 공산당들 총살장에 입회를 하고 돌아오다 어느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마시는데 집행리였던 김 하사의 술회,
"해방 전 저는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살았는데 그때 어쩌다 행길에서 동포를 만나면 그렇게 반갑더니, 바로 그 동포를 제 손으로 글쌔, 쏴 죽이다니요.... 그것도 무더기로 말입니다...... 망할 놈의 주의......그 허깨비 같은 주의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놈의 주의가 원숩니다......" 하고 그는 “으흐흐.. "흐느꼈다.
나는 전란을 치르면서나, 30년이 된 오늘이나 저 김하사의 표백(表白), “망할 놈의 주의......그 허깨비 같은 주의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놈의 주의가 원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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