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만영 시인 / 나와 당신과 레인코트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2. 08:00
이만영 시인 / 나와 당신과 레인코트

이만영 시인 / 나와 당신과 레인코트

 

 

여름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목록 중

 

비의 냄새만으로

장밋빛 잠에 취하게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당신은 깔깔거린다

 

노란 레인코트의 당신을 본 그날

이미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고

 

와인 잔 속으로

알몸을 텀벙텀벙 빠뜨리며

거짓말처럼

이 계절이 영원하기를 바랐는데

 

나와 당신 그리고 레인코트

미안해,뭔가 썩 어울리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어

 

레인코트를 걸친다는 건

빗방울 소리로 세상을 뒤덮는 일이고

축축한 시선의 무단침입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했지만

 

숲으로 빚은 바람과

먼바다를 스쳐온 바람의 차이만큼

처음부터 우린 태생이 달랐던 건 아니었을까

 

가끔 당신은

레인코트 대신 우산을 집어 들곤 했지

나는 더러워진 레인코트를 분리수거함 통에 구겨 넣으며

그렇게 몇 번의 여름을 탕진해버렸고

 

한여름에 마주친 폭설처럼

우리에게 익숙했던 길조차 지워져 버렸는데

 

그해 여름은 유난히 길었고 다음 해 봄은 지독히 멀었지

우린 서로 다른 일상으로 되돌아가 버렸고

 

고요하게 빛나던 레인코트와

커피 자국이 섞인 얼룩들이 맞닿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지금,

갇혀버린 겨울의 수면 위로 목마른 당신의 여름이

끓어 넘치고 있는데

 

-계간 <문파문학> 2020년 봄호

 

 


 

 

이만영 시인 / 극장골​

​​종료 1분전, 크로스 패스가 올라오고

수비수 맞고 굴절된 공

헤딩 슛, 골라인 안으로 빨려 들어간 공

함성을 지르고 어깨에 어깨를 감싸 안는 사람들

그래 그거야

소름이 돋는 시선, 공(空)으로

상대방 골대 그물을 찢어버리고

*

누워서 공(空)을 굴리는 서커스를 본다

팽팽해진 밧줄 위를 외발자전거를 타고 건너는 광대

그래 그거야

저런 게 인생 외줄의 축소판이지

그런데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람

차창 너머 불빛은

늦은 밤 어둠을 찢으려 달려 나가고

*

엉뚱한 곳

그물이 출렁이는 반대쪽으로

쓰러지는 골키퍼

오늘의 불행이 어제의 행운과 뒤바뀐 것일 뿐

뿔뿔이 관중은 흩어지고

스탠드 위 함성도 들려오지 않는다

패배를 인정하든 승리를 자축하든

아직도 트랙을 돌고있는 그림자

공空, 공空, 공空,

공,

발,끝,발,끝,

아 재밌어

공空으로 산다는 건

공회전의 굉음에 더 이상 놀라지 않는 일

맥주잔의 거품이 공중에

몸을 조각조각 부서져 버리는 일

-계간 『시산맥』 2022 가을호

 

 


 

 

이만영 시인 / 구름은 어떤 형태의 그림자를 원할까

 

 

구름 일부를 베어왔다

뜻밖에도 아니, 뜻과 밖 어느 곳이었을까

매듭을 푼 결말이 술술 풀리는 일

나는 이미 읽혀버렸고

고양이 구름은 꼼짝하지 않았지

올 풀린 꼬리가 실종의 유일한 단서야

내가 나라는 살아있는 증거

꼬리에 꼬리를 물려면 격리된 독방이 필요할 거야

유리창 너머로 안방이 손바닥처럼 접히고

꼬리를 끊고 도망치는 창문 틈 구름을 바라볼 때

침대 위에는 눈물 자국이 남았지

식탁 위를 떠가는 구름을 모아 푹신푹신한 저녁을 차리기 위해

숟가락으로 선인장 껍질을 벗겨본다

벗길수록 맑게 읽히는 이름 혹은 추상명사들

거실에서 나를 만난 사람은 없고 골목은 목덜미처럼 자꾸 줄어든다

하늘을 벗겨 새털을 쇠털처럼 세어 봐

구름이 구름을 끌어들이고

구름은 구름의 그림자를 빠져 달아나고

참 이상도 하지

벽 속으로 새털구름은 자꾸만 태어나고

발을 모으면 뭉쳐지는 꿈

누군가 내 꿈을 밟고 있어

 

 


 

 

이만영 시인 / 누드

 

 

태풍은 북상 중

태풍주의보가 발령 중인데

애인은 사진 촬영 수업 중이라고 문자가 온다

누드모델을 초빙해서 사진작품을 찍는 중이라고 한다

과열된 수업열기

학생들 앞에 긴 시간 긴장된 누드모델 옆에 누군가가

실수로 퍽!

쓰러트린 조명등이 깨지고 어둠 속에 터진

비명소리

그 바람에

태풍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진로가 완전히 바뀐다

기상 캐스터가 태풍의 눈을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동안

거대한 가로수가 자동차를 덮치고

용량이 큰 메모리가 장착된 카메라

 

애인은 전시회에 출품할 고화질 사진을 찍기 위해

태풍의 중심부라도

뚫고 나갈 태세로

 

카메라 셔터만 눌러대고 있을 테고

 

나는 우산이 뒤집힐 것 같아 바람 부는 쪽을 향해

고개를 꺾는다

휘청거리는 몸뚱이

균형을 잃은 평균대 위의 곡예사처럼

흑백사진과 컬러작품 중 어느 쪽이 예술적 분위기를

살려낼까

분홍색 원피스 차림의 기상 캐스터가 퇴장하자

나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로

채널을 돌린다

 

창밖엔 누드모델이 발가벗고 흘려보낸 시간이 무심코

비에 젖은 나뭇잎처럼 둥둥

떠다니고...

 

웹진 『님Nim』 2023년 6월호 발표

 

 


 

 

이만영 시인 / 생일

 

 

최초의 문장을 기억하니

선명한 하늘빛 담은 너의 얼굴빛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상관없어

멀리서라도 빛날테니까

계절은 감염되었고

지난여름 넌 이미 죽었고

막다른 골목 같던 그때 그 말투로

쓰던 편지를 계속 써야겠지

친애하는 촛불에게 ​

일렁이고 있어

네가 ​

너무 고요히 흔들리는 건 딱 질색이지만

*

시월은 누가 누구를 기념하기에 좋은 시간일까

누구에게든 편지를 끄적일 수 있다면

다행한 일 아닐까

하늘을 들여다봐

구름 웅덩이 속 우리는 분명히 있었는데

네 그림자는 없었지

표정 잃은 눈빛이 무수했지

나는 네 그림자를 찾아 헤엄쳤어

촛불이라도 다시 켤까

무덤 깊은 곳에도 빛은 환하겠지만

예전에 가 보았던 식물원 기억나니

지겨운 듯 하품을 하면서도

그때, 난 참 좋았어

그런데 너는 오늘도 잠에 빠져 있구나

축축한 날에는 웃지 말아야지

식물들 앞에선 찬물도 마시지 말아야지

마지막 불이 꺼지면 뭘 할까

분홍빛 색종이로 입술이라도 접어볼까

머플러로 머리를 묶어 볼까

오래된 키스라도 포장해 볼까

초록색 피로 얼굴을 그려보는 건 어때

손바닥에 말라가는 식물을 올려놓고

날개라도 달아달라고 기도할까

고요 속 비명이라도 지를까

너에게 닿아버리게

익사해 버린

첫울음

린넨 플레어스커트 무늬처럼

상상력이 필요한 일들

*

여기 좀 봐

하나로 모여드는 소실점 같은

화분 깊은 곳에서

네가 새로 태어나려고 해

 

-계간 『포엠포엠』 2021년 가을호 발표

 

 


 

 

이만영 시인 / 지난여름, 물렁물렁해진 거북 등처럼

‘사랑의 기쁨’에 대하여 시를 써달라 창밖

나무로부터 청탁을 받는다

 

노트를 펼치면

하얗고 따끈한 잉크로 쓴 이야기들

 

대체로 이해하고

대체로 이해하지 못하는

 

식탁 위 샐러드와 빵과 우유

아침이 식어간다

 

시를 고치려다 시를 놓치고

아침을 먹으려다 아침을 놓친다

 

*

 

다가갈수록 달아나고

모을수록 흩어지는

 

버린 시 한 문장씩 접어 커튼을 만든다

창밖에 숲이 나타나고

그 한가운데 테니스코트가 보인다

 

통통 튀어 오르는 활자 같은 공

내 사랑의 기쁨은 대체 어디쯤 튀어 오르고 있을까

 

*

 

사랑의 변질에 관해 쓴다

내가 나를 버려도 변절자가 되지 않는 방법은

어디 있을까

 

나는 나를 피한다

나를 나는 낭비했다

창문 속 새로운 창문이 생긴다

신문지 속 사람들은 수백 개의 표정을 움켜쥐고 있다

시가 될 수 없는 갈변된 표정들

 

쏟아버린다

물렁물렁해진 거북 등처럼

 

어제 쓴 시를 다시 읽는다

신문지 속 흑백 표정들이 조용히 듣고 있다

​-무크(Mook) 『용인문학』2023년 발표

 


 

이만영 시인

198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시각디자인) 졸업. 제8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등단. LGAD 근무. 현재 한국언론진흥재단 근무. 2018년 39회 근로자문학제 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