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준태 시인 / 인간은 거룩하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3. 08:00
김준태 시인 / 인간은 거룩하다

김준태 시인 / 인간은 거룩하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한 그릇의 물일랑도 엎지르지 말라

물 속에는 사람의 하늘이 출렁이나니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그대여

한 삽의 흙일랑도 불구덩이에 던지지 말라

 

오늘 우리는 달팽이라도 어루만지자

오늘 우리는 풀잎이라도 가슴에 담고 설레이자

풀 여치, 지렁이, 장구벌레, 물새, 뜸북새, 물망울

땅 위에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나 거룩하냐

땅 위에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나 거룩하냐

 

오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우리 이제 흐르는 강물에 발을 적시며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으러 나가자

우리 이제 땅 위의 칼들을 녹슬게 하고

바람이 어찌하여 불어오는가를 귀기울이자

 

오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우리 이제 물과 흙 속에 뼈를 세우고

옛사람 잠든 산천에 찔레꽃이 피어나듯

물거품 같은 빛깔도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하듯이

우리가 사람과 사람이라는 사실을 끝끝내 노래하자

 

- 시집 <국밥과 희망> (풀빛, 1984)

 

 


 

 

김준태 시인 / 길

 

 

어디로

가야 길이 보일까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어디에서 출렁이고 있을까

 

더러는 사람 속에서 길을 잃고

더러는 사람 속에서 길을 찾다가

 

사람들이 저마다 달고 다니는 몸이

이윽고 길임을 알고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기쁨이여

 

오 그렇구나 그렇구나

도시 변두리 밭고랑 그 끝에서

눈물 맺혀 반짝이는 눈동자여

 

흙과 서로의 몸속에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바로 길이었다.

 

-시집 <밭詩>에서

 

 


 

 

김준태 시인 / 아무나 보듬고 싶다

 

 

이제 아무나 보듬고 싶다

무식하게 정말 일자무식하게

사람이여 환장하게 좋은 사람이여

아무나 보듬고 설레이고 싶다

그리하여 더욱 아무나 보듬고

우리가 사람과 사람이라는 놀라움을

강물에 입술 적시듯 노래하고 싶다

생명이여 생명의 소중한 것들이여

이제 나는 아무나 보듬고 싶다

사람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이제 나는 아무나 보금도 싶다.

우리가 너무 깊이 보듬어

마음에 행여 가시가 박힌다 손

육신에 행여 손톱자국이 머무른다손

생명이여 생명의 소중한 눈동자여

사람의 뼈는 하늘의 기둥!

 

 


 

 

김준태 시인 / 봄

 

 

잡년아 봄이다 잡년아 봄이다.

겨우내 깊은 데 숨어서 속살거린 잎 잎들이

빈가지마다 간통죄로 끌려나온다

살에 달린 것 전부 내밀어 놓은 채

잡년아 시간에 걸려 바르르 떠는 잡년아

바람에게 거짓말난 한 빈 가지를

몰래몰래 뻗어 들어간 동상(凍傷)의 뿌리를

봄은 알아냈구나 기어이 알아냈구나!

 

 


 

 

김준태 시인 /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슬퍼하지마라

절망하지 마라

좌절하지 마라

그리고 꿀꺽꿀꺽 먹어라

그리고 파닥파닥 살아라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강물이 흐르고 새가 날던

아득한 옛날부터

 

장미꽃에

물방울이 맺혀 구르듯

이 세상 천지 모든 것들은

그렇게 둥그러이 그렇게

완벽한 꿈으로 젖어 있나니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구멍이 뚫리거나 쭈그러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그것은 깊은 바닷속의 물고기처럼

지느러미 하나라도 잃지 않고

이 세상 구석구석을 살아가며

때로는 파아란 불꽃을 퉁긴다

 

오늘 슬퍼하지 마라

오늘 절망하지 마라

오늘 좌절하지 마라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주룩주룩 슬퍼하는 자는

벼락을 맞아 죽으리라

하늘과 땅을 보면서도

절망하는, 좌절하는 자는

악마와 돼지가 돼 버리리라

 

오오, 이 세상은

아이에게 젖을 빨리는

어머니와 산봉우리로 가득하고

밭고랑에 씨앗을 놓는

아버지와 봄비와 하느님으로 가득하다

 

오오, 하늘 아래

빈틈없이 꽃피어 있는

사람의 사람다움!

사람의 눈물과 앞가슴!

그리고 사람의 따스운 두 손!

 

 


 

 

김준태 시인 / 콩알 하나

 

 

누가 흘렸을까

 

막내딸을 찾아가는

다 쭈그러진 시골 할머니의

 

구멍난 보따리에서

빠져 떨어졌을까

 

역전 광장

아스팔트 위에

밟히며 뒹구는

파아란 콩알 하나

 

나는 그 엄청난 생명을 집어 들어

도회지 밖으로 나가

 

강 건너 밭이랑에

깊숙이 깊숙이 심어주었다.

그때 사방팔방에서

저녁노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준태 시인 / 5.18은 민족의 지평선입니다

 

-잊지 말자 그리고 기억하자(Vergessen nicht und Erinnern!)

베를린 근교 작센하우센 나치수용소 정문에 새겨진 대형글자판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살아남은 우리들―

그 뜨거웠던 가슴 죄다 식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빗발처럼 쏟아지던 총소리, 살을 찢는 총소리 속에서도

하늘밥을 만들어 서로 나눠먹던 그 아름다운 사람들

 

차마 어찌 잊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동나무 오동꽃, 찔레나무 찔레꽃 저리 향기 높은데

우리들 어쩌자고 망각의 잔을 마셔버릴 수 있겠습니까

 

잠꼬대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같이 굳은 맹세였던 우리들―

분단조국의 사생아가 진두지휘하는

탱크와 군홧발에 짓밟힌 님들의 눈물은

죽지 않고 땅에 스며 이 나라 뿌리를 적시는데

술 몇 잔에 비틀거릴 수는 없습니다

 

세월이 병들고 시대가 병들어도

우리는 방황할 수 없습니다

총소리 총소리 총소리 속에서도

모두가 한 몸 되어 싸우고, 나눠먹고,

어루만지고, 쓰러지고, 다시 손잡고 일어섰던

 

죽고 못살게 귀여운 새끼들을 낳는

우리 사랑 한반도 여기 청춘의 님들이여

전대병원 조대병원 적십자병원, 산부인과 병원마저

총상환자들로 가득 넘치던 1980년 오월 그 날의 광주―

아 영원한 청춘의 도시 빛고을의 푸르렀던 님들이여

 

5·18은 역사를 갈아엎어 밭을 일구고

피에 넘치던 논바닥의 물꼬를 텄습니다

일망무제 하늘 저편까지 펼쳐진 그리움이었습니다

무등산 심심산천의 백도라지도 금남로로 충장로로

뛰쳐나와 엉엉 울며 손과 손을 마주잡은 바다였습니다

 

아우성과 피투성이로 무너져 내린 절벽 앞에서

절뚝절뚝거렸던 우리들의 끝나지 않는 사랑이여

5·18은 해마다 해마다 첫울음으로 태어나서

아장아장 하얀 발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월 그 날이 오면 저렇게 눈부시게―

 

아기부처, 아기 예수처럼 걸어갑니다

어린 다윗처럼 엉터리 바보 골리앗을 때려눕힙니다

 

아아 그 해 오월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난

상처뿐인 광주가 가르쳤으니

땅 위에 씨앗을 뿌리면 밭이 되지만

땅 위에 뿌리지 않으면 총칼이 쌓입니다!

 

사랑과 평화는 총구멍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젖내음도 향그런 어머니인 대지의 밑창에서 태어납니다!

 

그리하여 에헤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5·18은 청산에 청산에 청산에 살어리랏습니다

무등산과 지리산, 한라산과 인왕산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우리들 할아버지 할머니

저 순백의 백두산, 백두산의 상상봉으로 달려갑니다

 

죽어서도

자식들에게 젖꼭지를 물려주는

산 너머 강 건너 흰옷나라 어머니들이여

5·18은 노동의 밭―일하라 일하라 소리치며

지평선으로 아아 지평선으로 멀리 머얼리 펼쳐집니다

 

5·18은

더 이상 민족반역자 허수아비를 세울 수 없는―

더 이상 민족학살자들의 총칼을 불러들일 수 없는

콩, 보리, 밀, 기장, 벼, 수수, 고추, 마늘.....

온갖 곡식 온갖 생명의 모가지들이 넘실넘실 파도치는

광막한, 아 광활한 지평선입니다 그리운 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5·18은 무덤이 아닙니다

죽고 못살게 껴안아야 할 둥근 씨앗입니다

배달겨레 씨종자입니다 눈물보다 더 맑은 씨종자입니다

 

헛되고 헛된 흘러간 옛사랑이 아닙니다

첫사랑의 검은 눈동자―역사의 당당한 당당한 키스입니다

 

피묻은 깃발이 아닙니다

구만리 하늘 펄럭이는 민족민주평화통일의 깃발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십 년 백년이 넘도록 기도하는

정든 산 돌고 돌아, 산꿩도 푸드득 날으는 고향길입니다

 

아아 사랑과 평화와 민족의 지평선으로 새벽얼굴로 떠오르는

오월이여! 그대 이 땅 예언의 긴 나팔을 불고 있나니 내일이여!

오동나무 진보라빛 꽃 펴오르면 천년만년의 백학무리로 나래 치는

우리 사랑 한반도 오월이여! 두 주먹 모아 쥐던 굳은 맹세여!

이제 가자 어서 가자 우리들 어머니가 목놓아 부르는

저 남남통일, 저 광활한 남북통일의 아름다운 나라로!

 

 


 

김준태(金準泰) 시인

1948년 전남 해남 출생. 조선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 대학 1학년 재학중인 1969년 〈시인(詩人)〉지에 시를 발표.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참깨를 털면서》가 당선하며 문단에 등장. 시집 '참깨를 털면서',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국밥과 희망', '불이냐 꽃이냐', '칼과 흙', '밭詩', '달팽이 뿔' 등. 전남고등학교 교사, 신북중학교 교사, 광주매일 편집국 부국장, 광주매일신문 편집국 문화부 부장, 조선대학교 초빙교수. 현재 5.18 기념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