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승자 시인 / 虛 위에서 춤추는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3. 08:00
최승자 시인 / 虛 위에서 춤추는

최승자 시인 / 虛 위에서 춤추는

 

 

老子는 다만 도덕경을 썼을 뿐

(그리하여 도덕경이 있을 뿐)

따스한 햇살 아래 돌담길을 돌아가는

저 늙은이보다 더 나을 것은 없다

老子도 늙은이도 있는 세계는 有의 세계이고

老子도 늙은이도 없는 세계는 無의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루한 虛로서의 세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비로소 아름다움을 되찾으려 애쓴다

虛 위에서 춤추는 有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무상이니 더 가져가라

 

 


 

 

최승자 시인 / 불안

 

 

깊은 밤 하늘 위로

숨죽이며 다가오는 삿대 소리.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죽음이 나를 겨누고 있다.

어린 꿈들이 풀숲으로 잠복한다.

풀잎이 일시에 흔들리며

끈끈한 액체를 분비한다.

별들이 하얀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쨍! 죽음이 나를 향해 발사한다.

두 귀로 넘쳐오는 사물의 파편들.

어둠의 아가리가 잠시 너풀거리고

보라! 까마귀 살점처럼 붉은 달이

허공을 흔들고 있다.

 

 


 

 

최승자 시인 / 아침 햇빛, 코스모스, 다람쥐

 

 

오늘은 아침 햇빛이 넘보라살이다

아침부터 누가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왜 행복하면 안 되는지

그 신비를 믿고 물으면서

누군가 또 죽어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존재의 댄스, 굼벵이 댄스

 

그래도 아침 햇빛, 코스모스, 다람쥐,

사물에 부딪치고 부딪쳐

가볍게 떠오르는 깊은 무의식들

보이지 않는 처절한

그러나 때로는 아름다운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라고 말했지만

詩人들에게는 사물들의 총체가 이미 세계이고

사실들의 총체는 이미 지옥이다

 

(사실들로부터 사물들로 뛰어 오르라고

아침은 아침마다 다른아침이 된다)

 

-시집 <물 위에 씌어진>에서

 

 


 

 

최승자 시인 /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살아왔나

 

*보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아으 비려라

이 날것들의 生)

 

 


 

 

최승자 시인 / 너는 묻는다

 

 

너는 묻는다 언제냐고

나는 대답한다 모른다고

확실한가 안 확실한가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

내일이 올지 안 올지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

너는 눈을 떨군다

 

수세기의 바람이 그냥 불어간다

수세기의 눈[雪]이 그냥 잠잠하다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중에서

 

 


 

 

최승자 시인 / 장마

넋 없이 뼈 없이

비가 온다

빗물보다 빗소리가 먼저

江을 이룬다

허공을 나직이 흘러가는

빗소리의 강물

내 늑골까지 죽음의 문턱까지

비가 내린다

물의 房에 누워

나의 꿈도 떠내려간다

 

 


 

 

최승자 시인 /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피어나는 꽃 피면서 지고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부는 바람 늘 쓸쓸할 것이며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내리는 비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며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최승자 시인

1952년 충남 연기군에서 출생. 1971년 고려대학교 독문과에 졸업. 고려대 재학중 교지 『고대문화』의 편집장. 유신 시대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학교에서 쫓겨남.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 「우리 시대의 사랑」 등 몇 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옴.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연인들』. 2001년 이후 투병 하며 활동 중단. 2010년 《쓸쓸해서 머나먼》, 2010년 제18회 대산문학상. 2010년 제5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2017. 제27회 편운문학상 시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