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오 시인 / 모독하는 짓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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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시인 / 모독하는 짓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침저녁으로 마당을 비질하시던 젊은 아버지를 곧잘 떠올리며 아침저녁으로 시를 쓰지 않는 나를 힐책한다
밤낮으로 재봉틀을 밟으시던 젊은 어머니를 곧잘 떠올리며 밤낮으로 시를 쓰지 않는 나를 힐책한다
직업이 운전수였던 젊은 아버지는 트럭을 세워놓던 마당을 늘 말끔하게 치워 놓으셨고, 직업이 전업주부였던 젊은 어머니는 자식들이 벗어놓은 솔기 터진 옷을 늘 살펴 꿰매어 놓으셨다 직업이 시인인 나는 언제나 시를 쓰려고 애쓰지만 완성하지 못한다
시에 매료되어 지내기 위해 유리한 측에 가담하지 않고 사소한 사건에 집착하고 이익을 좇는 자들을 멀리하는 성격을 나는 스스로 터득했다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 어머니한테서 성격을 물려받았다느니 안 물려받았다느니 따지면 아버지 어머니를 모독하는 짓
하종오 시인 / 생활
직장생활 근 십년이 되었습니다. 밥과 돈에 얽혀드는 삶이 싫어서 시 쓰는 일을 아름답게 여겼던 생각 그마저 잊고 아홉 살배기 아들 장래 걱정합니다. 자식에게 보람 두는 사람들의 참다움도 알고 먼저 그렇듯 살아가는 나를 조금도 부끄럽게 느끼지 않는 뻔뻔함도 늘었지요. 시인이라고 해서 이 일상을 버리라고 한다면 쳐다보면 늘 있는 푸른 하늘도 형벌입니다.
세월이라는 것도 저대로 오고가지 않고 아비들이 모여 간난과 고통에 늙고 자식들이 커서 낫게 살아내는 만큼 깊어져서 늘 오늘 하루인 거지요
에잇, 내 시가 못마땅해 가타부타하는 분들 내게서 떠날테면 떠나라지요 떠나라지요 시인한테는 밤하늘 달무리만 있읍니까요 밥과 돈이 인간을 바꿔 버린다는 것을 알고부터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늘 같은 오늘로 깊은 세월이었습니다. 무섭고 괴롭고, 그래도 직장생활 나는 계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종오 시인 / 나무들은 서로 다르게 흔들리지만
바람이 분다. 분다. 잎새들이 흔들린다. 흔들린다. 나무들은 홀로 흔들리면서 숲으로 흔들리는 가운데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바람에게 저를 맡기지 않고 다만 저의 일생을 가다듬는다. 벌레한테 싱싱한 부분을 내주고도 더 넓은 전체를 가지고 울울하다. 비가 온다. 비 온 뒤에 나무들은 일시에 맑아져 자연으로 푸르러져 간다. 이 동류!
하종오 시인 / 신분
한국 청년 지한석 씨가 하는 몸짓 손짓을 미얀마 처녀 파파윈한 씨는 가만히 바라본다 파파원한 씨는 이주민이고 지한석 씨는 정주민이지만 같은 공장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노동자여서 손발도 맞고 호흡도 맞다 공장의 불문율에는 일하고 있는 동안엔 남녀 구분하지 않고 불법체류 합법체류 구분하지 않고 출신국가 구분하지 않는다는 걸 그도 알고 그녀도 안다 세계의 어떤 법령에도 노동하는 인간의 신분을 따질 수 있다고 씌어 있진 않을 것이다 한국 청년 지한석 씨가 내는 숨소리에 미얀마 처녀 파파윈한 씨는 가만히 귀 기울인다
하종오 시인 / 밴드와 막춤
동남아에서 한국에 취업 온 청년 넷이 밴드를 만들어 연습하다가 저녁 무렵 도심 지하보도에서 처음 한국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공연 준비를 마치자 노인네들이 몰려와 둘러섰다
기타는 스리랑칸 베이스는 비에트나미즈 드럼은 캄보디안 신시사이저는 필리피노 허름한 옷차림을 한 연주자들은 낡은 악기로 로큰롤을 연주했다
노인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 대자 다른 노인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 대고 노파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 대자 다른 노파 한 분 나와서 몸 흔들어 댔다
막춤을 신나게 추던 노인네들은 연주자들이 블루스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노인 한 분과 노파 한 분 다른 노인 한 분과 다른 노파 한 분 양손으로 살포시 껴안고 양발로는 엇박자가 나도 돌았다
미소 짓던 동남아 청년 넷은 저마다 고국에 계신 노부모님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적 없었다 싶으니 더 정성껏 연주하고 노인네들은 저마다 자식들이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적 없었다 싶으니 더 흥겹게 춤을 추었다
하종오 시인 / 헌옷 도둑
골목 모퉁이에 놓여 있는 헌옷 수거함은 뚜껑 잠긴 채 투입구만 뚫려 있었다 겨우내 헌옷만 입고 다니는 나는 이따금 갇힐까 싶어 종종걸음쳤다
평일 밤에는 슬그머니 긴 집게를 넣어 투입구로 몇 벌씩 빼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층 어패럴 공장에서 일하는 파키스탄 남자들은 긴 바지와 셔츠만 골라서 가져가고 지하 어패럴 공장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자들은 예쁜 속옷만 골라서 가져갔다 빈국으로 수출한다는 수거업자는 주말 낮에만 와서 자물쇠를 풀어 뚜껑 열고 그들이 남긴 옷가지만 트럭에 실으면서 나에게 오며가며 잘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단 한 벌도 쑤셔 넣어본 적 없는 내가 헌옷 수거함에 갇히고 싶도록 남루하던 날 얼른 투입구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내가 입은 옷보다 새것 한 벌이 잡혀 나왔고 그 하루가 싱긋 웃으면서 지나갔다
―《불교문예》 2006년 봄호
하종오 시인 / 나무들은 서로 다르게 흔들리지만
바람이 분다. 분다. 잎새들이 흔들린다. 흔들린다. 나무들은 홀로 흔들리면서 숲으로 흔들리는 가운데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바람에게 저를 맡기지 않고 다만 저의 일생을 가다듬는다. 벌레한테 싱싱한 부분을 내주고도 더 넓은 전체를 가지고 울울하다. 비가 온다. 비 온 뒤에 나무들은 일시에 맑아져 자연으로 푸르러져 간다. 이 동류!
-시집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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