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수익 시인 / ​​추락을 꿈꾸며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3. 08:00
이수익 시인 / ??추락을 꿈꾸며

이수익 시인 / ​​추락을 꿈꾸며

 

 

최고봉이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룸으로써

하늘의 뜻과 가까워지려는 듯,

 

만년설 덮인

해발 4,478미터의 마터호른 산은

오늘도

은빛 낭떠러지 빙벽에 매달린

알피니스트들을 조용히 거부하듯 밀어내지만

 

저 죽음의 향기에 마취된 이들은

벼랑이 뿜는 현란한 추락의 상상력에

몸을 떨며

천형처럼 암벽을 기어오른다

 

세상의 때를 묻히고 싶지 않은

고고한 산이 날카롭게 세우는 죽음의 벼랑 아래로

아득하게,

 

죽음에 위한 이들이 걷는 길이 있다.

 

 


 

 

이수익 시인 / 사진사(寫眞師)

 

 

처음엔 버릴 것부터

잘라가면서

나중에야 나무의 미학(美學)을 손질하는

정원(庭園)의

전지작업(剪枝作業)처럼.

 

시야에 비친 풍경 속에서 사진사(寫眞師)는

먼저/ 버릴 것부터 생각한다.

 

버리고 버리고 버리다가

결코

버릴 수 없는.

 

그 일순(一瞬) 교감(交感)을 영상에 담으면

나머지는 공허한 허상(虛像)의 풍경들이

울음 우는

카메라의 저 바깥 외계(外界).

 

 


 

 

이수익 시인 / 나에겐 병이 있었노라

 

 

강물은 깊을수록 고요하고

그리움은 짙을수록 말을 잃는 것

 

다만 눈으로 말하고

돌아서면 홀로 입술 부르트는

연모의 질긴 뿌리 쑥물처럼 쓰디쓴

이 사랑의 지병을.

 

아는가...그대 머언 사람아.....

 

 


 

 

이수익 시인 / 승천

 

 

내 목소리가

저 물소리의 벽을 깨고 나아가

하늘로 힘껏 솟구쳐 올라야만 한다.

 

소리로서 마침내 소리를 이기려고

가인(歌人)은

심삼유곡 폭포수 아래에서 날마다

목청에 핏물 어리도록 발성을 연습하지만,

 

열길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쉽게 그의 목소리를 덮쳐

계곡을 가득 물소리 하나로만 채워버린다.

 

그래도 그는 날이면 날마다

산에 올라

제 목소리가 물소리를 뛰어넘기를 수없이 기도(企圖)하지만,

한 번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

폭포는

준엄한 스승처럼 곧추 앉아

수직의 말씀만 내리실 뿐이다.

 

끝내

절망의 유복자를 안고 하산한 그가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마을과 마을을 흘러다니면서

소리의 승천을 이루지 못한 제 한을 토해 냈을 때.

 

그 핏빛 소리에 취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소리꾼이라 하더라.

 

 


 

 

이수익 시인 / 아직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강물에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강물도 내게 한 마디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본 것은

순간의 시간, 시간이 뿌리고 가는 떨리는 흔적,

흔적이 소멸하는 풍경........일 뿐이다.

 

마침내 내가 죽고, 강물이 저 바닥까지 마르고,

그리고 또 한참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혹시, 우리가 서로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 어렴풋이

하나, 둘 떠오를지 모른다. 그때까지는

 

우리는 서로 잘 모르면서, 그러면서도 서로

잘 아는 척, 헛된 눈빛과 수인사를 주고 받으며

그림자처럼 쉽게 스쳐 지나갈 것이다. 우리는

아직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수익 시인 / 어머니

 

 

어머니는 나에게

천수관음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내 그림자를 몰래

밟으신다

귀를 열고 내 숨소리 하나하나 죄다 들으신다

손이 천 개로도

부족하시다

 

나는

어머니에게 무간지옥의 형벌을 덮어씌었으니

죽어서도 어머니는

결코, 죽지 못하신다

 

 


 

 

이수익 시인 / 배후가 따뜻하다

 

 

길옆

자전거보관소에

몸이 뜯긴, 오래된, 주거불명의

자전거 몇, 버려져 있다.

 

안장이 사라지고

체인이 풀린

타이어가 땅바닥까지 함몰된 자전거들이

구겨진 풍경의 액자를 만들며

어둠 속을 비스듬히 누워 있다.

 

오랜 무관심에 길들여진 편안함이

어느덧 그 심연에

맞닿아

나태의 궁핍이 제법 반질반질하다.

 

이제는 더 이상 뜯길 것 없으므로

자유가 너희를

화평케 하리라!

 

날마다 이맘때쯤 찾아오는 그늘이

친구처럼 유정하게 툭, 툭,

바큇살을 건드리는 오후

 

자전거들은

왕년에 달리던 기세를 되살려

저렇게 뻗어나간 아스팔트길을

씽씽 내질러보고 싶은 푸른 욕망에 진저리치며

한 번씩은 꿈틀,

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이수익 시인

1942년 경남 함안 출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  『야간 열차』 『슬픔의 핵(核)』 『단순한 기쁨』 『그리고 너를 위하여』 『아득한 봄』 『푸른 추억의 빵』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등. KBS에서 프로듀서로 활동, 라디오 부국장 역임.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 공초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수상. 협성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