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요 시인 / 전파사 강씨 탈출기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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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요 시인 / 전파사 강씨 탈출기
한 가지 색깔이 심심해진 알록달록한 옥수수가 세상에 오게된 건 자리바꿈 유전자 때문이라는군 매클린 톡이라는 자가 삼십여 년 옥수수 밭에 파묻혀 궁리 끝에 알아낸 비밀이라는 거지 버릇처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시계의 시침 초침을 조율하던 전파사 강씨가 야반도주한 이유 아무도 모를 거야 나는 혼자 실실거리며 그에게 자리바꿈 유전자가 생겨난 때문이라 믿는 거야 끝물 옥수수, 쭉정이가 되어버린 날들이 그를 못 견디게 한 거지 평생 종종걸음 치며 살아온 강씨의 궤적은 두 평 전파사를 벗어나지 못했어 시간이라는 말뚝에 묶인 그에게 뿔이 솟아난 거지 아버지가 암병동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 휑하니 바람이나 쐬고 싶다고, 강씨에게도 숨쉴만한 바람이 필요했을 뿐이야 몸 어딘가에서 모종의 돌연변이가 일어난 거야 저마다의 말뚝에 묶여 째깍째깍 사라진 강씨에 대해 잊고 있던 어느 날 한 줄기에 남색과 보라색 꽃이 제멋대로 어우러진 희한한 나팔꽃을 만났어 줄기들은 어떤 간절함으로 하늘을 칭칭 감고 올라가고 있더군 자리를 바꿔 앉은 강씨가 겁 없이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기어오르고 있는 거야
김지요 시인 / 덫
비법을 전수 받아 그들을 초대한다
바나나 껍질을 컵에 담고 드나드는 통로를 차단한다
금세 펼쳐지는 파놉티콘 날개짓보다 빠르게 퍼지는 소문 바나나를 파고드는 초파리들 훼방꾼이 컵을 건드리자 온통 소란으로 북적인다
치명적 달콤함과 죽음은 조용한 이웃 죽어도 좋을까 죽어도 좋아
누구도 불러들일 수 없는 한줌의 공간을 줌으로 끌어당긴다
출구 없는 착란 속으로 내가 또 다른 내가 붕붕
천국 혹은 지옥
김지요 시인 / 한여름 밤의 꿈
깜깜한 바닷가, 밤 한 칸을 빌린다 후줄근해진 여자가 부려진다 지친 저녁을 실어 나르는 바퀴 소리들 배경으로 깔린다 간간이 파도소리가 발가락을 간질이고 아스팔트 위 누각엔 잠이 고이지 않는다 카톡 카톡 토막 난 잠,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소스라친다 여자는 파도소리와 뒤엉키며 무시로 체위를 바꾼다 또 다시 벨소리 남자는 남자의 말을 여자는 여자의 언어만을 쏟아낸다 다른 행성에서 온 교신처럼
치사량의 온기를 위해 여분의 베개를 부탁한다 여주인은 소란스러운 이 별에 숨어든 자가 없는 지 힐끔, 방안을 스캔한다 베개를 끌어당겨 안는다 애써 아름다운 해안선을 상상한다 졸리운 물살이 종아리에 차오른다 아이들의 비명이 귓바퀴를 찌른다 터질 듯 한 고요와 간헐적 소음이 샴 쌍둥이처럼 얼굴을 바꾼다 책을 읽는다 덮는다 차라리 밤바다로 뛰쳐나갈까 생각한다 여자, 남자, 밤, 섬, 혼자
지리멸렬한 무대, 지상에서의 '쉼'을 꿈꾸는 그녀의 모노드라마
김지요 시인 / 블루진을 찾습니다
빨간 티에 블루진을 입고 초록초록 정글로 가네 햇살이 팽팽하게 당겨져 뱀의 입 속으로 놀러가기 딱 좋은 날
무성한 나무들이 두리번거리며 뱀과 공모 중이었어 맹랑한 꼬맹이를 삼켜버리자고
철딱서니 개구리 블루진은 다리를 까닥거리며 정글의 삶은 징글징글 하품이 나올 지경
서로의 독을 나누는 키스쯤이야
죽을 테면 죽어야지 살 테면 죽어야지
사라진 블루진을 찾습니다. 소스라쳐 뒷걸음치던 뱀은 또 어디로 갔나요
컴컴한 뱀의 아가리로 투어를 가실 분들 비굴함을 가릴 마스크 따위 벗어던지기 딱 좋은 날 세상 위험한 철딱서니가 되어 풍덩!
*코스타리카블루진(딸기독화살개구리)
-애지, 2022년 가을호에서
김지요 시인 / 냄비 손잡이에 관한 보고서
끼니를 때울 땐 라면이 제격이고 라면은 양은냄비에, 냄비 손잡이는 숟가락을 이용해야 전문가의 격이 느껴지지 않는가 양은냄비 손잡이를 숟가락을 이용해 들어 올릴 때는 몇 가지의 불문율이 있다네 숟가락을 쥐고 있는 손의 힘 조절은 필수지 너무 세게 냄비를 들어 올리면 단박에 평형감각이 깨지고 말지 냄비 속의 라면 국물이 술렁이고 손잡이는 상대를 얕잡아보게 마련이야 숟가락의 기울기 또한 지나칠 순 없지 지렛대와 같은 완급 조절이 필요해 숟가락이 턱없이 깊게 들어가면 헛손질만 하게 된다네 손잡이에 휘둘리는 날에는 다 끓인 라면을 엎기 일쑤 바닥에 풀어헤쳐진 라면을 주워 담는 일이란 누구에게나 굴욕적이지
변검술에 능한 生의 손잡이를 다룰 때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 그럼에도 무릎을 꿇게 하는 변수를 만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기를, 뜨거운 손잡이를 맨손으로 잡는 실수는 더더욱 없기를, 수없이 물집이 자리 잡았던 손으로 쓰는 손잡이의 주도권에 대한 방법론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라네
《웹진문장》2013년 3월호
김지요 시인 / 화공들
누구나 그림에 관해 이야길 했다 알 수 있는 그림과 알 수 없는 그림에 관해
어떤 이는 숲을 끝없이 덧칠했고 어떤 이는 나선형의 계단을 그렸다 말 머리에 사자의 다리가 있는 그림 꽃에서 여우가 나오는 그림 숨은 그림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새로워, 새로워, 새로움에 목맨 자들 한 떼의 화공들이 미지를 향하여 달려갈 때 진부하기 그지없는 꽃을어머니를 그리고 또 그리는 이도 있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고 매일 그리지만 모두가 쓰레기라고, 울었고 웃었고 비꼬고 뒤집고 그림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별천지 같았다 고흐의, 렘브란트의 마성을 훔쳐올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것 같았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비평가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세상과도 잘 사귀면 다 된 거라고
저마다의 근심을 챙겨들고 총총히 자리를 떠나는 전혀 새로울 게 없는 그림이었다
김지요 시인 / 구름의 門에 기대어 -S시인을 추모함
구름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내가 있었네 왜소한 어깨 한쪽이 기울어지도록
발 한쪽은 허공에 한 쪽은 지상에 두고 천칭을 기우뚱거리며 가까스로 살아있었네 하늘에 닿을 수 없는 하루를 중얼거리며
구름을 빚을 때 만큼은 작은 눈이 깊고 푸르게 반짝였네 걸을 때마다 솔기가 튿어진 구름이 폴폴 날리곤 했지
몸을 날려 하늘에 닿는 날도 있었네 담배 연기로 구름을 빚느라 몸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하늘에 닿아 구름의 몸을 입은 사내가 있었네 전리품들은 황홀했네
구름이 아름다운 건 끝없이 몸을 바꾸며 사라지기 때문일 거야
시가 없는 그는 한낱 연기일 뿐이네 사람들은 그를 추억하며 말하겠지 지나가는 구름일 뿐이었다고
한 줄기 맵찬 연기가 허공으로 사라지네 우중의 천칭이 아주 잠깐 흔들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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