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재삼 시인 / 사랑의 노래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3. 08:00
박재삼 시인 / 사랑의 노래

박재삼 시인 / 사랑의 노래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는 그 일보다

크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보냐.

 

그것은

하도 아물아물해서

아지랑이 너머에 있고

산너머 구름 너머에 있어

늘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찾아 헤매는 것뿐

 

그러다가 불시에

소낙비와 같이

또는 번개와 같이

닥치는 것이어서

주체할 수 없고

언제나 놓치고 말아

아득하게 아득하게 느끼노니.

 

 


 

 

박재삼 시인 / 나무 그늘

 

 

당산나무 그늘에 와서

그동안 기계병으로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을까 몰라.

이 시원한 바람을 버리고

길을 잘못 든 나그네 되어

장돌뱅이처럼 떠돌아 다녔었고

이 넉넉한 정을 외면하고

어디를 헤매다 이제사 왔는가.

그런 건 다 괜찮단다.

왔으면 그만이란다.

용서도 허락도 소용없는

태평스런 거기로 가서,

몸에 묻은 때를 가시고

세상을 물리쳐보면

뜨거운 뙤약볕 속

내가 온 길이 보인다.

아, 죄가 보인다.

 

 


 

 

박재삼 시인 / 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

 

 

못물은 찰랑찰랑

넘칠 듯하면서 넘치지 않고

햇빛에 무늬를 주다가

별빛 보석도 만들어 낸다.

 

사랑하는 사람아,

어쩌면 좋아!

네 눈에 눈물 괴어

흐를 듯하면서 흐르지 않고

혼백만 남은 미루나무 잎사귀를,

어지러운 바람을,

못 견디게 내게 보내고 있는데!

 

 


 

 

박재삼 시인 / 산에 가면

 

 

산에 가면

우거진 나무와 풀의

후덥지근한 냄새,

 

혼령도 눈도 코도 없는 것의

흙냄새까지 서린

아, 여기다, 하고 눕고 싶은 목숨의 골짜기 냄새,

 

한 동안을 거기서

내 몸을 쉬다가 오면

쉬던 그때는 없던 내 정신이

비로소 풀빛을 띠면서

나뭇잎 반짝어림을 띠면서,

내 몸 전체에서

정신의 그릇을 넘는

후덥지근한 냄새를 내게 한다

 

 


 

 

박재삼 시인 / 가난의 골목에서는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 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간다. 그 정도로 알거라.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오고 바다에나 가는 것이 아닌것가.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이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그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참말로 참말로 우리의 가난한 숨소리는 달이 하는 빗질에 빗어져, 눈물 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이다.

 

 


 

 

박재삼 시인 / 신록(新綠)

 

 

봉사 기름값 대기로

세상을 살아오다가

 

저 미풍微風 앞에서

또한 햇살 앞에서

 

잎잎이 튀는 푸른 물방울에

문득 이 눈이 열려

 

결국

형편없는 지랄과 아름다운 사랑이

 

한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촌끼리임을 보아내노니,

 

 


 

 

박재삼 시인 / 無言으로 오는 봄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박재삼(朴在森) 시인 (1933년-1997년 향년 64세)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절대궁핍을 경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195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