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영산 시인 / 모든 죽음은 환희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3. 08:00
김영산 시인 / 모든 죽음은 환희다

김영산 시인 / 모든 죽음은 환희다

-생비(生碑)

 

 

모든 죽음 앞은 환하다

검은 상복 입고 죽음은 오지 않는다. 그것은 산 자들의 옷!

 

지구에 발 딛고서 먼 빛을 보라

그 누구도 죽음 직전은 환희다

 

오 어떤 죽음도 환희다

오 어머니 죽음 앞은 환희다

 

별들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우주적 서정을 꼭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어머니 임종을 못 본 형제가 있더라도

 

오 그 누구도 죽음 앞이 환하다

검은 상복 입고 죽음은 오지 않는다

 

 


 

 

김영산 시인 / 조나단

 

 

귀로 가수 박선주는 스물둘에 노래를 더 잘 부르고 싶어 미국에 갔다

 

지하철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너무 잘한다.

음악은 천재들만 하는 거구나

나는 천재가 아니구나

일 년 반 만에 벌었던 돈을 날려버렸다

월세가 자꾸 밀리고 주인에게 쫓겨났다

 

벤치에 앉았더니 노숙자가 자기 자리라고

나는 일어났다

왜 네 자리냐고 물었다

그가 파놓은 조나단 이름을 가리켰다

 

"넌 행복이 뭐라 생각하니?” 내가 묻자 조나단이 대답했다

자기가 원하는 걸 하는 삶이라고

자기는 다 이뤄서 행복하다고

자기는 원래 뉴욕에 사는 게 꿈이었다고

 

 


 

 

김영산 시인 / 라일락 한 그루를 나도 갖고 있지

 

 

골목 깊은 집 마당가에

라일락 한 그루를 나도 갖고 있지

젊은 날 확 바꿔버린 강렬한 향기를

그래서 폐부 깊이 멍들었다 생각했건만

나는 여태 연시 한 편 못 썼지

세월이 흘러 늙도록 담장 밑에

너를 붙들어 두고 싶진 않았지만

오월의 라일락 꽃무더기는

내 영혼을 떠난 육신처럼

나뭇가지에 온통 거품이 일어

이젠 철마다 엄습하듯 피지

 

 


 

 

김영산 시인 / 메밀콧등치기

 

 

정선역 앞 식당에서 그대와

메밀콧등치기를 먹으며

메밀로 콧등을 치며 콧등을 치며

콧등에 흘러내리는 메밀느름국수를 먹느라

메밀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아우라지 아우라지 가는 기차를 기다린다

구절리 구절리는 기차가 가지 않고

마음의 오지 침목마다 선로를 깔면

단풍 든 기차 창밖에 아우라지 강물 흐르고

한나절 기다려 하루 한 번 타는 기차는

아우라지 가는 승객 둘만

메밀콧등치기를 먹으며

 

 


 

 

김영산 시인 / 난 맥박대로 살기로 했다

 

지구

 

 

나는 시를 쓰다 말고 가슴이 아파

서맥

우주맥

우주 맥박을 잰다

 

가슴이 아파 병원에 갔다

가슴 통증

심장혈관병원

심장병은

세상을 너무 많이 사랑한 죄 때문인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하며 하트가 그려진 병실마다 돌아다닌다

내가 24시간 심전도 기계를 차고

스무 살 때도 심장 일기를 쓴 적이 있는데

또 기계는 기계를 부르고 기계를 목걸이처럼

걸고 집에 왔다

 

며칠 후였다.

가슴이 아파

간호사 애인은 산에 오르다 말고

맥박을 재보자 한다

 

손목을 내밀자

그거 말고 엎드리고 바지 내려요

 

항문에도 맥이 뛰나요

 

뛰나,

 

무릎을 가슴에 붙이고요

새우처럼

아 하고 따라해요

체온부터 잴게요

 

내가 쑥스러워 팔을 내밀자

애인이 손목을 재고

 

그대 맥은 특이해요

끝내줘요

 

*註: 위의 시 「난 맥박대로 살기로 했다」의 화자는  '지구'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명이 들어갈 자리에 '지구'라고 표기된 점, 김영산 시인과의 전화통화로 확인.

 

 


 

 

김영산 시인 / 돼지

-큰누님

 

 

 망헐놈의 돼야지, 망헐놈의 돼야지 금시 싸움질이여― 피범벅 된 꼬리 물어뜯으러 우르르 몰리는 놈들 간짓대로 패 운동장 내모니 불콰한 콧등 식식대며 흙덩이 마구 파헤치다,

 

 접붙이랴 새끼 받으랴 주사 놓으랴 사료 주랴 똥 치랴 어미돼지 씨돼지 고기돼지 젖돼지 흰 돼지 검은 돼지 붉은 돼지 꽥꽥 울어쌓는 돼지막,

 

 돼지는 우리 동네 고막손 아버지들 적부터 돼지 짠해하는 큰누님에 배어 콧구멍 벌렁대는 냄새 풍긴다

 

-시집 『벽화』 (창비, 2004)

 

 


 

 

김영산 시인 / 시(詩)가 사기라는 네 말을 이젠 부정할 수 있겠다

 

 

 나는 지난 겨울 영흥에 갔었다 거기서 돌 가져왔지 사람 얼굴 크기만한 돌을 파도 무늬가 새겨진, 고뇌에 찬 얼굴 형상 돌을 내 책상 한 귀퉁이 놓고 날마다 바라본다

 

 그 제단(祭壇) 위에 가끔 향불 피우지 처음 있은 일이지 돌 가져온 것도 이렇듯 기도하는 것도 당신도 내 방에 돌어와 봤을 테니까 보았겠지 돌멩이와 그릇에 담긴 재를 아마 무심히

 

 우리가 각방을 쓰기 시작한 게 처음 있는 일이지 결혼 십육년 째 별거 아닌 별거 가장 가까이서 먼 거리를 본다 수십 번 이혼이라는 말보다 몇 달 째 갑갑한 침묵보다 무심한 백치 같은 눈빛

당신의 고요한 눈빛

 

 나는 병원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지 아내여 나는 수술실에서 보았지 당신 배를 가를 수 있는 데까지 가르고 한무더기 내장을 드러내 보여주는 의사의 손 돼지 뱃속 같은 당신 속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지

 

 당신은 인공항문을 달았지 그게 복개수술보다 아프고 수치스럽다는 걸 나는 안다 복대로 허리를 친친 감고 넋나간 사람처럼 집안을 걸어다닌다 여전히 직장에 나가 맑은 소리로 라디오 방송을 하고 텔레비전에 나가 밝은 얼굴로 말한다 그러다가 집에 와선 침대에 누워 꿈쩍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당신은 안방에 누워 입을 다문다 나는 영흥에서 가져온 돌을 보고 신령스러운 푸른 빛 감도는 두 눈이 푹 꺼진 콧대는 높고 입은 말한 적 없는 얼굴 형상의 돌을 다시 본다

 

-시집 <벽화> 창비. 2004년

 

 


 

김영산 시인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중앙대 문창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박사 수료, 1990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동지(冬至)〉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평일』 『벽화』 『게임광』 『詩魔』 『하얀 별』. 산문집 『시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 장편동화 『주먹열매』 등. 한국예술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