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니 시인 / 가을을 삼키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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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니 시인 / 가을을 삼키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들었을 때 푸른 하늘이 구름을 안고 토닥이는 것을 보았다 햇살이 눈부셔 눈을 감았을 때 나뭇잎이 바람을 안고 일렁이는 소리를 들었다 붉어지는 것들은 눈물보다 푸르다 물가를 걷는 하얀 깃털 고개를 들어 가을을 삼키고 있다
김고니 시인 / 막걸리
저녁마다 뽀얀 달을 마셔야 한다 집을 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에 그슬린 노가리 같은 얼굴로 달을 한 잔 마신다
종일 썰어 놓은 살점들을 안주로 달을 한 잔 마신다
달을 한 병 다 비우고 나서야 달이 되는 사람들
코를 고는 달
집을 짓는 일은 달이 되는 것이다
ㅡ시집 『달의 발자국』 (밥북, 2016)
김고니 시인 / 봄눈
떠나려다 뒤돌아보는 겨울의 하얀 거짓말
왼쪽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다 수술하고 깁스를 했는데 다들 왼손이라 다행이라 했다 밥을 먹을 수 있으니
그런데 방송글을 쓰는 작가라 자판을 쓸 수 없는 비애는 나만 느껴야했다
그런데 세상 좋은분들 많았다
내 손이 아픈걸 보고 문을 열어주는 분 잡아주는 분들이 많았다 기다려주는 분들이 많았다 짐도 들어주고 무겁다고 노트북 가방도 들어주었었다 그래서 덜 슬펐다
왼손을 잊고 있던 날의 미안함도 있었다 그 후 양손을 쓰기 시작했다
왼 손으로 수저를 들기도 하고 글씨를 쓰기도 하고 서툴지만 왼 손도 사랑하기로 했다
아픈 손으로 문여는 일 참 어려운 일이다
누가 열어주면 참 좋은데 문에 잘 못 닿으면 통증이 심하다
닫힌 마음에 아픈 마음으로 열려면 더 힘들다
서로 건강해지면 좋겠다는 생각 으로 이 시집을 천천히 읽어가야겠다
-시집 『아픈 손으로 문을 여는 사람들에게』에서
김고니 시인 / 숨질 5
한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때 그의 목덜미를 물지 않고 숨소리를 가만히 들을 수 있어야 해
꿈속을 걷고 있는 그가 심장 소리를 내고 있을 때 얼굴에 얼굴을 대고 같은 리듬으로 숭을 쉬어야 해
그의 숨이 내게로 조금씩 스여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의 심장이 뛸 때마다 그의 영혼이 연기처럼 숨결을 따라 내게로 올 때 어둠 속에서 그 순간을 바라보며 행복해진다면 너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숨이 하나가 되는 푸르고 붉은 영혼이 어둠 속에서 보라색 등불이 되어 가는 소리를 들을 때 긴 입맞춤의 밤이 시작되는 거야
김고니 시인 / 세상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밖에 나갈 땐 눈만 내놓고 마스크를 써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래서 서로 눈만 바라보며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게 되는 그런 날이 올 줄이야
세상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만나서 밥 한 끼 먹는 것이 죄가 되어 서로 몸을 숨기며 살아갈 날이 올 줄이야 그래도 위로가 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세상에 이런 내가 될 줄이야 그토록 죽고 싶어 갈망하던 마음을 잊고 미치도록 살고 싶은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김고니 시인 / 어머니
꽃같이 예쁜 딸아, 예쁜 내 딸아 나는 어머니의 꽃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머니가 나의 꽃이었다는 것을
그리운 향기를 찾는 나비처럼 어머니의 무덤가를 서성인다
어머니, 당신은 나의 꽃이었어요
김고니 시인 / 세한도歲寒圖
피가 검게 멍들 때쯤이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 붓으로 그려놓은 오두막 한 채라도 괜찮아지는 것이다 푸르던 소나무,먹빛으로나마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바람도 찾아오지 않는 어느 깊은 골짜기라도 홀로 앉을 집 한 채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창문을 내지 않은 집, 햇살도 없이 먹빛으로 핏줄을 흐르는 나룻배가 되어 남은 생을 둥둥 떠다니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길가에 핀 제비꽃 한 송이를 만나면 그저 반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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