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고니 시인 / 가을을 삼키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4. 08:00
김고니 시인 / 가을을 삼키다

김고니 시인 / 가을을 삼키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들었을 때

푸른 하늘이 구름을 안고

토닥이는 것을 보았다

햇살이 눈부셔

눈을 감았을 때

나뭇잎이 바람을 안고

일렁이는 소리를 들었다

붉어지는 것들은

눈물보다 푸르다

물가를 걷는 하얀 깃털

고개를 들어

가을을 삼키고 있다

 

 


 

 

김고니 시인 / 막걸리

 

 

저녁마다 뽀얀 달을 마셔야 한다

집을 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에 그슬린 노가리 같은 얼굴로

달을 한 잔 마신다

 

종일 썰어 놓은 살점들을 안주로

달을 한 잔 마신다

 

달을 한 병 다 비우고 나서야

달이 되는 사람들

 

코를 고는 달

 

집을 짓는 일은 달이 되는 것이다

 

ㅡ시집 『달의 발자국』 (밥북, 2016)

 

 


 

 

김고니 시인 / 봄눈

 

 

떠나려다 뒤돌아보는

겨울의 하얀 거짓말

 

왼쪽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다

수술하고

깁스를 했는데

다들 왼손이라 다행이라 했다

밥을 먹을 수 있으니

 

그런데

방송글을 쓰는 작가라

자판을 쓸 수 없는 비애는 나만 느껴야했다

 

그런데 세상 좋은분들 많았다

 

내 손이 아픈걸 보고

문을 열어주는 분

잡아주는 분들이 많았다

기다려주는 분들이 많았다

짐도 들어주고

무겁다고

노트북 가방도 들어주었었다

그래서 덜 슬펐다

 

왼손을 잊고 있던 날의 미안함도 있었다

그 후 양손을 쓰기 시작했다

 

왼 손으로 수저를 들기도 하고 글씨를 쓰기도 하고

서툴지만 왼 손도 사랑하기로 했다

 

아픈 손으로 문여는 일 참 어려운 일이다

 

누가 열어주면

참 좋은데 문에 잘 못 닿으면 통증이 심하다

 

닫힌 마음에 아픈 마음으로 열려면 더 힘들다

 

서로 건강해지면 좋겠다는 생각

으로 이 시집을 천천히 읽어가야겠다

 

-시집 『아픈 손으로 문을 여는 사람들에게』에서

 

 


 

 

김고니 시인 / 숨질 5

 

 

한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때

그의 목덜미를 물지 않고

숨소리를 가만히 들을 수 있어야 해

 

꿈속을 걷고 있는 그가

심장 소리를 내고 있을 때

얼굴에 얼굴을 대고 같은 리듬으로 숭을 쉬어야 해

 

그의 숨이 내게로 조금씩 스여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의 심장이 뛸 때마다

그의 영혼이 연기처럼 숨결을 따라 내게로 올 때

어둠 속에서 그 순간을 바라보며 행복해진다면

너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숨이 하나가 되는

푸르고 붉은 영혼이

어둠 속에서 보라색 등불이 되어 가는 소리를 들을 때

긴 입맞춤의 밤이 시작되는 거야

 

 


 

 

김고니 시인 / 세상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밖에 나갈 땐 눈만 내놓고

마스크를 써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래서 서로 눈만 바라보며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게 되는

그런 날이 올 줄이야

 

세상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만나서 밥 한 끼 먹는 것이 죄가 되어

서로 몸을 숨기며 살아갈 날이 올 줄이야

그래도 위로가 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세상에 이런 내가 될 줄이야

그토록 죽고 싶어 갈망하던 마음을 잊고

미치도록 살고 싶은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김고니 시인 / 어머니

 

 

꽃같이 예쁜 딸아,

예쁜 내 딸아

나는 어머니의 꽃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머니가 나의 꽃이었다는 것을

 

그리운 향기를 찾는 나비처럼

어머니의 무덤가를 서성인다

 

어머니,

당신은 나의 꽃이었어요

 

 


 

 

김고니 시인 / 세한도歲寒圖

 

 

피가 검게 멍들 때쯤이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

붓으로 그려놓은 오두막 한 채라도 괜찮아지는 것이다

푸르던 소나무,먹빛으로나마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바람도 찾아오지 않는 어느 깊은 골짜기라도

홀로 앉을 집 한 채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창문을 내지 않은 집,

햇살도 없이 먹빛으로

핏줄을 흐르는 나룻배가 되어

남은 생을 둥둥 떠다니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길가에 핀 제비꽃 한 송이를 만나면

그저 반가운,

 

 


 

김고니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16년 월간 <see> 추천 시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달의 발자국』 『냉장고를 먹는 기린』 『팔랑』. 공저 『첫눈 오는 날』. 2017년, 2019년 강원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서울시인협회, 강원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