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황인숙 시인 / 그 사랑의 여름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4. 08:00
황인숙 시인 / 그 사랑의 여름

황인숙 시인 / 그 사랑의 여름

 

 

밖은 밤이다

란아랑 보꼬는 골풀 돗자리에서

네 발을 천장 향해 뻗고

곯아떨어져 있다

명랑이는 어디 있나?

흐흐, 반투명 연둣빛 캣터널 속에서

엎드려 자고 있다

다들 곤한 얼굴로 웃으며 잠들어 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이 무한반복 불러제끼는

‘somebody to love’가 우당탕 쿵쾅

온방을 울려도 아랑곳없이

아아, 그 사랑의 여름

우리의 온 여름을 채워주었던

지미 핸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제이거 앤 에번스,

스테판 울프……

 

밤은 밖이다

나는 막,

막 기울어지는 마음 일으켜 세워

비틀비틀 나간다

 

 


 

 

황인숙 시인 / 새의 눈

 

 

무아지경으로 흐르는

자타불이의 세계

 

해는 새의 눈

모든 새의 눈

밤에는

부엉이 눈에

들어가 있지

 

 


 

 

황인숙 시인 / 이렇게 또 한 여름이

 

 

여기 감수성 풍부한 이름이 있다

옷이 있다 헝겊이 있다 가죽이 있다

천장이 있다 벽이 있다 바닥이 있다

 

하늘이여,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건가?

 

여름 되자마자

장마, 또 장마

그 끝에 이틀

미친 비 꽐! 꽐! 꽐!

80년이라나, 100년이라나,

관측 후 최대 강수량이라지

 

실로 오랜만에

햇빛 쨍한 아침이다

너덜너덜 난파선에

생존자는 나뿐인 듯

토할 것 같은 햇빛!

 

옥상 저 끝까지

빈 화분이 굴러가

기억들처럼 나동그라져 있다

천 년 전에

우리 고양이들이랑 들여다보면

빨간 장미가 살았던 화분

화분을 가득 채웠던 흙이

이제 한 톨도 남아 있지 않겠지

 

네가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계속 비가 와서 그래

내일도 모레도

 

나동그라진 여름!

 

<시인수첩> 2022, 가을호

 

 


 

 

황인숙 시인 / 월식

 

 

누가 별로 젊지 않은

한 이방 여인의

안위를 걱정하겠는가

버스는 끊어지고,

식당을 나서

여인은 걸어간다

퉁퉁 부은 다리를 번갈아

지상에서 살짝 떼었다 무겁게 내려놓는다

비바람이 불지 않아도

눈보라가 몰아치지 않아도

깊은 밤

 

더 짧게 질러가는 길이

있을지 모르는데

알고 싶어 하지 않고 그녀는

매일 같은 길을 걸어간다

무뚝뚝하지만

헤매지 않을 길을

간혹 버스가 있을 시간에도

그녀는 걸어간다

버스비를 아끼자고

허겁지겁 돌아갈 게 뭐람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방

 

일이층은 보석상점과 양품점

지하와 삼사층은 까페와 식당

쇼핑센터 네 등이 둘러싼

좁다란 광장

거기서 이어지는

대로에서 대로, 그리고 작은 방

 

가녀리건 해쓱하건

누가 이미 젊지 않은

한 이방 여인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눈 여겨 보겠는가

일산이나 강남의

중국에서 온 여인

혹은 하와이나 뉴욕의

한국에서 온 여인

 

어쩌다 제 땅을 떠나

인적 끊긴 깊은 밤

모형 도시 같은 거리를

경직된 얼굴로 따박따박

혼자 걸어가는

제 땅에서도 가난하고

낯가리고 겁 많았을

 

 


 

 

황인숙 시인 / 모진소리

 

 

모진소리를 들으면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더라도

내 귀를 겨냥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모진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쩌엉한다

온몸이 쿡쿡 아파온다

누군가의 온몸을

가슴속부터 쩡 금 가게 했을

모진 소리

 

나와 헤어져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내 모진 소리를 자꾸 생각했을

내 모진 소리에 무수히 정 맞았을

누군가를 생각하면

모진 소리

늑골에 정을 친다

쩌어엉 세상에 금이 간다

 

 


 

 

황인숙 시인 / 인연

 

맨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지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한 그 순간

나는 키가 작아 앞줄에 앉고

너는 키다리.

맨 뒷줄이 네 자리

아, 우리가 어떻게

단짝이 됐을까!

키다리 친구들과 둘러서서

바람이 가만가만 만지는 포플러나무 가지처럼

두리번거리다 나를 보고

너는 싱긋 웃으며 손짓한다

너를 보면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

내 입은 벙글벙글.

 

 


 

 

황인숙 시인 / 어느 날 갑자기 나무는 말이 없고

 

 

햇살 아래 졸고 있는

상냥한 눈썹, 한 잎의 풀도

그 뿌리를

어둡고 차가운 흙에

내리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만

그곳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무는 말이 없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

(탄식과 허우적댐으로

떠오르게 하는)

이파리를

떨군다.

 

나무는 창백한 이마를 숙이고

몽롱히

시선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챙강챙강 부딪히며

깊어지는 낙엽더미

아래에.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에서

 

 


 

황인숙 시인

1958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리스본行 야간열차』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동서문학상(1999)과 김수영문학상(2004)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