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시인 / 쉬운 것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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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시인 / 쉬운 것들
입술에 묻은 것은 입속으로 들어가기 쉽다 손 가까이에 있는 것은 주머니로 들어가기 쉽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대개 어제 떠올랐던 것이고 내일도 또 떠오를 것이다 멀리 있는 것들 바깥에 있는 것들이여 높이 있는 것들 뒤에 옆에 아래 있는 것들이여 안으로 들어가 안에 있는 것들이여 보이지 않는 것들 보여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여 쉬운 것들이 어려워지고 어려운 것들이 쉬워질 때까지 손을 다시 보자 입과 귀와 눈 머릿속을 다시 보자 몸을 보고 또 보자 쉬운 것들이 쉬워질 때까지
-시집 『혼자의 넓이』, 2021, 창비
이문재 시인 / 얼굴 -아주 낮익은 낯선 이야기
내 얼굴은 나를 향하지 못한다 내 눈은 내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 손은 내 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얼굴은 남의 것이다 손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기 위한 것 누군가에게 내밀기 위한 것이다
입과 코가 그렇고 두 귀는 물론 두 발도 그러하다 안 못지않게 바깥이 중요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앞에 있는 나 또한 가장 귀중한 사람이다
조금 낯설지만 알고 보면 아주 낯익은 이야기다
이문재 시인 / 오래 만진 슬픔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이문재 시인 / 지구의 가을
이 음식은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두려워 헤아리지 못합니다 마음의 눈 크게 뜨면 뜰수록 이 눈부신 음식들 육신을 지탱하는 독으로 보입니다
하루 세 번 식탁을 마주할 때마다 내 몸 속에 들어와 고이는 인간의 성분을 헤아려 보는데 어머니 지구가 굳이 우리 인간만을 편애해야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텐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들어와 툭툭 끊기고 있습니다 나는 오래된 중금속입니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린다 해도 이 음식으로 이룩한 깨달음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이문재 시인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이문재 시인 / 화전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어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 불 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이문재 시인 / 모든 눈물은 모든 뿌리로 모두 간다
혼자 눈물은 두 손에 받는다 손은 단지다 손은 깊어지고 싶어 운다 두 손은 또 울면서 길어져서 뿌리에 가서 닿고 싶어한다 몸이, 몸이 되고 싶어한다
손의 절망은 자기 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러나 손은 거개가 타인이다 무시로 손은 타인을 향한다 내 손은 내가 아닐 때가 많다, 너무 많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손이다 대중소비사회는 손에 달려 있다 손을 잘 간수해야 한다고 두 손 둘데를 시시각각 결정해야 몸이, 몸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 지독하게 외로워진 것이다 손이 내 몸 거죽을 긁는다
뿌리의 손들이 붉은 꽃 게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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