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희성 시인 / 저 산이 날더러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4. 08:00
정희성 시인 / 저 산이 날더러

정희성 시인 / 저 산이 날더러

-木月詩韻을 빌어

 

 

산이 날더러는

흙이나 파먹으라 한다

날더러는 삽이나 들라 하고

쑥굴헝에 박혀 쑥이 되라 한다

늘퍼진 날 산은

쑥국새 울고

저만치 홀로 서서 날더러는 쑥국새마냥 울라 하고

흙 파먹다 죽은 아비

굶주림에 지쳐

쑥굴헝에 나자빠진

에미처럼 울라 한다

산이 날더러

흙이나 파먹다 죽으라 한다

 

* 목월시운(木月詩韻): 박목월 시인의 「산이 날 에워싸고」란 시의 운율인데, 그 시에 답한다는 뜻을 담음

* 쑥굴헝: 굴헝은 '구렁'의 사투리로 움푹 파인 땅 또는 빠지면 헤쳐 나오기 어려운 환경을 비유한 말.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1978년 초간, 1999년 복간)

 

 


 

 

정희성 시인 / 산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 창비, 2008.

 

 


 

 

정희성 시인 / 곰삭은 젓갈 같은

 

 

아리고 쓰린 상처

소금에 절여두고

슬픔 몰래

곰삭은 젓갈 같은

시나 한 수 지었으면

짭짤하고 쌉싸름한

황석어나 멸치 젓갈

노여움 몰래

가시도 삭아 내린

시나 한 수 지었으면

 

 


 

 

정희성 시인 / 새벽밥

 

 

충무로 사색기 인쇄소 골목

일방통행 갓길에 비켜서서

도회지의 허기가 밥때를

기다리고 있다

 

어린 과부와 산(山)만한 아들이

날치알을 비벼 주먹밥을 내주는 골목집

문이 열리자 목숨 같은 훈기가

비린 바다처럼 밀려나왔다.

 

어묵 한 그릇 진밥에도 이가 시리다

껍질을 벗을 때가 되었나보다

근력이 떨어진 인쇄공과 겸상을 물리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아나키스트 평전

십일 포인트 무게로 말라가는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마디진 생을 말아 쥔다

 

새벽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복권방으로 몰려가는 서슬에

길비둘기들이 눈발처럼 날아올랐고

이 해묵은 도시의 시장이 나와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화술로

시민중심 행복도시를 팔고 있다

 

밤새 바다는 안녕히 열렸을까

 

 


 

 

정희성 시인 /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돋는 생명을

가슴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귓가에 닿지 못한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남몰래 울며 하는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을 피울까 몰라

아픈 꽃을 피울까 몰라

 

 


 

 

정희성 시인 / 시인 본색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정희성 시인 / 건봉사 불이문 앞에서 그대 부음을 듣고

 

 

서둘러 그대를 칭송하지 않으리

이승의 잣대로 그대를 잴 수 야 없지

그대는 나에게 한이고 아쉬움

이 아쉬움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지만

그대는 처음 죽은 사람도 아니고

이 더러운 현대사 속에서

이미 여러번 살해당한 사람

나는 전쟁통에도 불타지 않은 불이문ㅇ[ 이르러

그대의 마지막 부음을 듣는다

둘이 아니라면 하나

하나도 못된다면 반쪽이지

통일의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걸오온 길이 뒤집히는 꼴을 보면서

그대는 기어이 등을 보이는구나

아아 노여움을 품고

한 시대가 이렇게 가는 거지!

 

누가 와서 내 가슴 쓸어주었으면!

사명대사 동상과 만해 시비 앞에 서서

나라 사랑 못 느낄 자 누구랴마는

나는 별 수 없이 떠돌이 시인

그대가 끝가지 귀를 열고 기다렸을

좋은 소식 전해주지 못한 채

고성 외진 바잣가에 이르러

마시던 술을 바다에 쏟아버린다

그대여 이 경박 천박한 세상 말고

개벽 세상에나 가 거듭 나시라

 

 


 

정희성 시인

1945년 경남 창원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졸업.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 1972년 숭문고등학교 교사. 시집 『답청(踏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 등. 그 밖에 『한국현대시의 이해』(共著) 등.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과 1997년 시와시학상, 불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이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 2014 제5회 구상문학상 수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