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평 시인 / 여인의 눈물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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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평 시인 / 여인의 눈물
엘카나가 한나에게 말하였다. "한나,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도 않고 그렇게 슬퍼만 하오? 당신에게는 내가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
자식 없는 한나가 울고 있네 자식 많은 프닌나에게 괴롭힘을 당했기에 남편의 위로마저도 소용이 없네
어느 팔십대 노모가 홀로 울고 있네 사설 요양원에 갇혀 있네 찾아오는 자식 하나 없는 외로움 속에서 주위 노파들의 위로마저도 소용이 없네
세상 떠난 그의 남편이 꿈속에서 말하였다 "임자, 왜 울기만 하오? 왜 자식들만 생각하며 그렇게 슬퍼만 하오? 내가 이렇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소?"
*사무엘기 상권 1장 8절에서 따옴.
이인평 시인 / 관계
새벽은 몇 사람의 부지런한 농부에게 발견된다 그것도 우연히 새로운 것은 항상 순수할 뿐 대화하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었을 뿐 기뻐 놀라거나 반색하지 않는다
새벽을 만나고 온 농부들은 어느 누구에게도,단 한 번도 새벽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
이인평 시인 / 천사의 꿈
오월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천사가 있었던 곳은 영원한 아름다움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 그 황홀한 빛 가운데 자리 잡은 궁궐이었네. 천사는 눈부신 빛을 두르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네.
신비한 빛 가운데 계신 하느님께서 천사에게 말했네. “애야, 너는 이 저울을 가지고 세상으로 가거라” 하시며 천사에게 매우 간단한 저울 하나를 건네주고 나서 다시 말했네. “무엇을 다는 저울인지 알겠느냐?… 너는 그 저울로 세상 사람들 마음을 달아 보거라. 그 저울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과 미움의 무게를 네게 알려 줄 것이다.”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천사를 보며, 하느님께서 또 말했네. “네가 직접 달아 보면 알겠지만, 그 저울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사랑과 미움의 무게에 따라 바늘이 좌우로 기울게 될 것이다. 사랑이 담긴 사람의 마음은 오른쪽으로, 미움이 담겨 있는 사람은 바늘이 왼쪽으로 기울 것이다. 자, 이제 너는 세상으로 가서 사람들의 마음을 달아 보거라. 마음의 무게가 미움으로 기울어진 자들은 지옥으로 보내고, 좌우로 전혀 기울지 않는 자들은 연옥으로, 그리고 마음이 사랑으로 차오른 이들은 천국으로 데려오도록 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다 들은 천사는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린 다음 빛나는 날개를 저어 지상으로 내려갔네.
지상은 아직 밤이었고 별빛들은 천사의 날개처럼 반짝이고 있었네. 천사는 고통에 지쳐 잠든 사람들을 바라보았네. 사람들은 사랑과 미움의 갈등 속에서 살고 있었네. 천사는 하느님께서 주신 저울을 가슴에 안고 가만히 사람들을 살펴보았네. 어떤 자들은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마구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온 마음을 쏟아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기도 하였네. 풀잎보다 먼저 시드는 명예에 눈먼 자들도 있었고, 고집스런 짐승처럼 탐욕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자들도 있었네. 그러나 세상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네. 그들은 모든 일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이루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고난을 기쁘게 인내하고 있었네. 그들은 또 은총과 깨달음의 경지, 즉 하느님의 뜻을 따름과 동시에 항상 모든 걸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과 언제나 자신의 모든 걸 거리낌 없이 내주는 사랑으로 행복을 누리고 있었네. 어디에서 사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네.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던 천사는 드디어 한 사내의 마음을 저울에 달아보기로 했네. 천사가 처음으로 저울에 달아보려는 사내는 아내와 세 자녀를 거느리고 사는 불혹의 시인이었네. 사내는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시인이었지만, 항상 하느님을 공경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었네.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을 떠도는 나그네 같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가족과 함께 세상의 길을 힘겹게 걷고 있는 사람이었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천사가 혼잣말을 하였네. “사실 인간의 마음에 담겨 있는 사랑과 미움을 달아본다는 것은 얼마나 진지하고 중대한 일인가! 그러나 인간의 비참을 보는 것은 또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가! 인간의 삶은 때로 흥겹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인간의 여정은 고통 속을 흐르고 있었구나!” 하고 탄식하였네. 그런 다음 천사는 그 사내의 마음을 저울에 달기 시작했네. 그 순간이었네, 천사가 그의 마음을 막 저울에 달려고 하는 순간, 천사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네. 천사가 저울에 달려고 했던 그 사내는 바로, 천사의 꿈 밖에서 살고 있었던 자기 자신이었네. 천사가 그 사내의 마음을 저울에 다는 순간, 동시에 천사 자신의 마음이 저울에 달리는 것 아닌가! 천사 역시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잊고 있었네. 자신을 먼저 달아야 하는 꿈속에서 놀란 천사가 “오,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그 사내를 보는 순간, 지상의 어둠 위로 아침 해가 떠올랐네. 맑은 햇살에 영혼이 깨이는 아침이었네. 꿈속의 천사가 떠나간 끝없이 푸른 오월의 길로 장미꽃 향기가 흐르고 있었네.
어느 날… 꿈속에서… 나는 천사였네.
이인평 시인 / 상여꽃
사십여 년 전, 아버지의 상여가 떠오르는 건 그때는 몰랐던 꽃빛깔 때문이지 아직 관을 상여에 얹기 전 햇살 머금은 상여꽃의 양감에 슬픔이 배어들어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아버지의 미소 같았던 노란 꽃, 파란 꽃, 하얀 꽃, 붉은 꽃들이 내 울음에 지쳐 빛이 바랜 듯 아버지 일생의 마지막 영화 같았지 지금 생각해도 슬픔이 물든 꽃빛은 한평생 농부로 살아온 아버지의 설움 같아서 마지막으로 기억할 아버지의 유언 같아서 아직도 꽃빛깔이 어른거리지 내가 죽기 전까진 아버지의 죽음은 늘 오늘이어서 나 죽는 날, 아버지도 마저 떠날 것이지만 상여꽃 만큼도 화려하지 못한 시절 엔 슬픔 머금은 꽃빛을 보며 추념할 사이도 없겠지요 령 소리를 들으며 장지로 떠나는 고별의 여운도 없이 하관 후에 활활 태우는 꽃상여의 마지막 불꽃을 보며 애통함이 함께 타오를 겨를도 없겠지 그땐, 마당 가에 꽃상여가 놓이는 순간 슬픔도 색색으로 피어 있는 꽃들이 나를 달래주는 아버지의 숨결 같아서 지금도 내 눈물 속엔 상여꽃이 피어나곤 하지 아버지와 함께 슬쩍 웃어도 좋은 꽃빛들이 아른아른 맺혀 오지
웹진 『시인광장』 2023년 8월호 발표
이인평 시인 / 자비송(慈悲頌)
누가 너의 고단한 삶을 나만큼 위로해 주겠느냐 누가 나만큼 달래 주겠느냐
저녁마다 네 십자가를 지고 와서 오랜 그리움처럼 하루의 감사를 내게 봉헌할 때 나는 네 인생을 아껴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누가 말없이 기다려주며 나만큼 널 사랑해 주겠느냐 누가 나만큼 기쁨을 주겠느냐
세파에 지친 너를 은총의 부드러운 숨결로 안아 주는, 아, 내 사랑의 손길만 닿아도 너는 언제나 행복하리 행복하리
나의 재아로운 열정에 안겨 네 한 목숨이 끝없이 행복하리
이인평 시인 / 눈 내리는 시인의 나라
아름다운 시인들을 만났습니다 세상은 고통 중이었습니다 주여,시대는 늘 가난의 고삐를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짊어지고 시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시인들의 마음으로 눈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시인들은 거리를 바라보며 지상에 서 있는 자신들의 언어를 통하여 사랑을 느낄지도 모를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오후의 찬바람을 안고 시인들이 길을 걸을 때 시의 옷자락 같은 눈송이들이 가슴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눈 내리는 시인의 나라에서 주여,겨울보다 맑은 시인들의 발걸음을 함께 따라 걷는 당신을 보았습니다.당신의 사랑이 시인들의 가슴에서 눈처럼 녹아내리는 꿈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시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듯 눈구름 사이로 노을을 이끌고 가는 해가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시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주여,아픔이 흘러도 시인들의 영혼은 따뜻했습니다 당신의 언어가 시의 혈관을 흐르듯,어느새 시인들의 자유는 깨어 있는 당신의 봄을 걷고 있었습니다 고통의 노래가 꽃잎처럼 안겨 오는 아름다운 봄의 나라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인평 시인 / 혼밥을 먹으며
비 오는 날 홀로 희끗희끗한 사랑이다 아프지 말자고 억지로 달랜다 먹다 말고 창밖을 본다 아프고 슬픈 기억들은 이미 지났고 잊어버린 것은 절로 용서가 되고 떠오르는 것은 거의 그리움이다 혼잣말로 한 숟갈 먹었다고 감사하다고 기도하다 졸음을 만난 한낮이 오랜 엄마 품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5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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