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우 시인 / 시여 노래여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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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우 시인 / 시여 노래여
무척 긴 무더위 끝에 온, 이른 가을 첫 비 내린 뒤의 그윽한 풀빛같이 혼자서 무심코 걸어가는 길 위에서 문득 만나는 때 이른 한 잎의 빛 고운 가랑잎같이 작은 연못의 무성한 넓은 잎 틈으로 보얗게 피어나는 수줍은 수련꽃같이 찬 수풀 너머 모래밭에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쓰고 돌아와 눕는 날 밤의 서쪽 하늘가에 걸린 붉은 초승달같이 내 가슴을 휘저으며 그가 왔다 시여 노래여 겹겹으로 두른 검푸른 산과 산, 그 산 너머 저 멀리 우뚝이 솟은 흰 산봉우리같이
양성우 시인 / 몽탄강*
나는 오늘 밤에 생시인 듯이 그 강물의 꿈을 꿀 것이다 잔물결 반짝이는 그 강가에 가서 물총새 해오라기의 날갯짓을 볼 것이다 운저리 황석어젓배 앞세우고 흑산 바다 홍어잡이 배들도 밀물을 따라서 올라오겠지 앞뒷산 그림자 일그러지며 물 아래 잠길 때쯤이면 간간이 솟구치는 참잉어 모쟁이 녀석들도 만나보고 현란하게 부서지는 저녁놀도 함께 바라볼 것이다 나는 꿈속에서 그 강으로 갈 것이다 꿈의 강에 천 리 넘는 먼 길인들 내가 어찌 못갈까 주름 깊고 허리가 휜 살붙이들의 땀 절은 푸른 들을 건너 긴 둑을 따라 갈대수풀 어우러진 그윽하고 아련한 곳 무지갯빛 그 먼 강에 내가 혼자 갈 것이다 나는 오늘 밤에 역력히 그 드넓은 강물의 꿈을 꾸며 내 가슴을 때리고 적시는 신비로운 강 울음소리도 들을 것이다
*몽탄강은 전라남도 무안 몽탄면과 나주 동강면 일대에 흐르는 영산강의 다른 이름임.
양성우 시인 / 어둠을 거두는 이 순간에는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 찬란한 아침 앞에 살아남은 형제들 어둠을 거두는 이 순간에는, 피 절은 손채찍 아래 아무리 둥줄기 갈라지고 발에 밟혀도 전날처럼 아프거나 그다지 서럽지도 않습니다. 내 비록 해묵은 기다림에 지쳐 살얼음 진흙 위에 때때로 눕고 나란히 줄에 묶여 돌에 눌린들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 채우는 불보다 더 뜨거운 큰 꿈 하나로 지금은 조금도 서럽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저 밝고 넘치는 빛 다가오는 아침 앞에 형제들 맨손으로 어둠을 거두는 이 순간에는
-詩集 『그대의 하늘길』 (創作과批評社, 2004)
양성우 시인 / 새벽기도
“당신의 아궁이에 마른 들풀로 주여, 차라리 나를 불태우소서. 옴붙은 세상만사 일마다 꼬이고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며 황음무도 팔도 잡놈 능구렁이들 개털에 벼룩 끼듯 하였으니,
당신이 버리신 돌자갈밭 더럽고 구역질 나서 못 살겠습니다. 차라리 당신 발끝에 으스러지고, 주여, 당신 뒤척이는 새벽바람에 억겁을 떠도는 작은 티끌로 이 몸 부서져 흩어지게 하소서"
양성우 시인 /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부산일보 / 오늘을 여는 詩』 2024.02.27.
양성우 시인 / 철공소에서
내가 구태여 음산한 이 지붕 아래 어찌하여 내 몸을 모조리 내 몸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온몸에 기름투성이, 갈라터진 손으로 망치질을 하고, 용접을 하고, 사시사철 낮인 줄 밤인 줄 모르고 프레스를 돌려도 우스워라 공연히 욕을 먹고, 발길질당하고, 혹시라도 간조날이면 제 돈 주는 것처럼 거만떠는 그 쬐그만 경리 계집애한테까지도 심지어는 업신여김당하는, 아뿔사, 우리들의 바쁘신 사장님의 저 빛나는 자가용차 뒷바퀴에 묻은 모래알만큼도 못한 신세일지라도, 그렇지만 이제 와서 나는 결코 병신처럼 한꺼번에 주눅들기 싫구나. 왜냐하면 물어보나 마나 사나운 팔자, 갈수록 산이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이 보잘 것 없고 앙상한 작은 가슴 속 깊이깊이 그 뿌리 시들지 않은 남모르는 꿈들이 고스란히 아직도 쇠붙이처럼 반짝이며 남아 있기 때문이라.
양성우 시인 / 어린이 놀이터에서
제아무리 먹을 것을 타고 태어난다지만, 있는 놈들은 더 가지기 위하여 발버둥치고 오오, 눈뜬 어미아비 매맞고 갇히고 낙엽처럼 쓰러지는 이 칼날의 시절에 자라나는 철모르는 아이들아. 염려마라.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 혹은 깔깔거리며, 맨발로 흙탕물 위에 딩구는 개구장이 너희들이 있기 때문에 이 땅 위엔 아직도 희망이 있다. 그렇다 너희들의 시절에는 한꺼번에 밤보다 더 짙은 어둠이 걷히고, 굶주려도 다 함게 배고프지 않는 기쁨의 날이 오리니, 염려 마라. 혹은 콧물 훌쩍이며 그네를 밀고, 미끄럼틀에 매달리는, 겹겹이 스며든 붉은 피 거름 위에 자라나는 철모르는 아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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