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육 시인 / 눈물의 염도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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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육 시인 / 눈물의 염도
눈물은 나의 오랜 양식 이세상 처음으로 맛본 것도 그것이었네 코흘리개 다섯 살은 콧물의 참맛에 미혹되었던 시절
아홉살 땐 주먹다짐을 하다가 펑펑 코피를 쏟고 뜨거운 피맛까지 알게 되었네
눈물, 코물에 생피까지 먹었으니 나는 이미 나를 모두 맛본 셈이네
그때 나는 알게 되었네 눈물 콧물 핏물이 모두 염장이 되어 있다는 사실
신께서 나를 온존케 하기 위해 함부로 부패하지 말라고 세월따라 숙성이 되라고 알맞게 온몸을 염장해 놓았음을 알았네
-시집 <사랑의 물리학> 중에서
김인육 시인 / 부조리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세상은 가도 가도 낯설 뿐이다 생활은 기계적이고 존재는 의심과 회의로 가득하다 나는 낯선 세계에 홀로 남겨져 있다 어머니 자궁에서 출궁되었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혼자다 이 세계의 이방인이다
어디선가 숙명의 꽃이 피었다 진다 죽음은 독자적이다 죽음은 우리의 행동도 아니고 경험도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간섭되지 않는 견고한 독자성이다 물론 신은 오래전에 죽었다
그래도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며 과거가 될 오늘을 미래처럼 기다려야 한다 꽃이 질 것을 알면서 피는 것처럼
우리의 기다림은 숙명이다 질 것을 알면서도 온몸으로 실존을 꽃피워야 한다 그것이 나의 숙명이다
나의 시지푸스는 오늘도 땀 흘리며 산으로 바위를 밀어 올린다
김인육 시인 / 개 같은 사랑에 대한 보고서
솜털 보송보송한 아홉 살 적, 하굣길에 흘레붙은 개들을 보았다 땡볕 대낮에 똥개 연놈이 서로의 튼실한 엉덩이를 맞대고 목하 열애 중이었다 서로의 몸과 몸을 관통한 붉고 뜨거운 기둥을 공유한 채 한통속이 되어 헐떡이며 불타고 있었다 그 거리낌 없는 사랑의 합체가 어린 심장을 사정없이 쿵쾅쿵쾅 쑤셔 박았다 민망함이었을까, 시샘과 질투였을까 나는 돌멩이를 집어 연놈에게 던졌다 따악, 놈의 마빡에 돌멩이가 정통으로 꽂혔다 한심하다는 듯 연놈은 잠깐 나를 쳐다보았을 뿐 붉고 뜨거운 기둥 더욱 단단히 서로를 꿴 채 암수한몸의 비경 끝내 풀지 않았다
오오, 놀라워라 붉고 황홀한 저 깊은 결속의 뿌리여! 오오, 위대하여라 내 것과 네 것이 하나 되는 저 뜨거운 합체여!
어느덧, 세상 눈치 살피는 중년의 세월 문득 ‘개 같은 영혼’이 그립다 개 같은, 이 세상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어울림에 대하여 너와 나 섞이어 더욱 견고해지는 하나 됨에 대하여 애꿎은 돌멩이에 철철 피 흘릴지라도 철부지 돌팔매쯤이야 애당초 두렵지 않은 그 열혈의 자세, 그립다
사랑은 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당당해야 한다는 그날의 가르침 한 수!
김인육 시인 / 사랑의 물리학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김인육 시인 / 대부도 연가
문득 그리움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날이면 그대, 대부도로 가게나
발가락 부르튼 열망 온몸을 웅크려 고뇌하는 가을 왕새우가 되어 파닥이다 붉게 소금에 구워지는 바다의 감미로운 주검을 만나보시게 그 향기로운 화형식에 참례하게나
돌아오지 않을 궤적의 별처럼 가야할 사랑일랑 썰물에 띄워보내고 미쳐 날뛰는 망둥어 연정, 안주인 양 저며놓고 소주 몇 병 카아 쓰라린 감탄사로 쏘며
가시리 가시리잇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어찌살라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불콰한 설움, 옛가락 한소절로 해풍에 흩날리우면 가던 길 도망쳐온 순정의 여인처럼 어느새, 밀물의 사랑 발밑으로 달려와 철썩철썩 나 당신없인 못 살겠소 밤새 울먹이는 바다를, 바보의 바다를 꼬옥 안아주시게 보듬어주시게
-시집 <사랑의 물리학> 중에서
김인육 시인 / 새 -피그말리온
새들은 죽어서 나무가 된다. 새의 애절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노라면 이를 알게 된다. 새의 발은 나무의 뿌리를 닮았다. 새가 나무와 한 족속임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다. 새의 날개는 욕망이다. 날개는 언제나 새를 지치게 한다. 새가 지쳤을 때 그의 안식처는 오직 나무가 된다. 새는 간절히 나무가 되고 싶다. 그 열망이 제 발을 나무의 발과 닮게 만들었다. 어떤 간절함은 그것이 되게 한다. 새는 나무에 앉아서 나무가 되는 법을 배운다. 바람이 불면 함께 흔들리고 비가 오면 같이 비를 맞는다. 욕망을 버린 날개는 날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무 위의 새는 새가 아니다. 하늘로 푸드덕 떨어지는 하나의 열매다. 새가 날개를 다소곳이 접고 나무에 앉으면 온전한 열매의 형상이 된다. 그는 온전한 열매의 형상이 된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나무가 된다. 적멸의 무량한 희열에 든다. 함허含虛에 든다. 새가 말없이 우주의 중심으로 깊이 뿌리를 내린다.
김인육 시인 / 시지푸스 사랑법
내 푸른 날은 꽃피울 것이 너무 많아 별도 바람도 햇살도 빗물도 팔 벌려 껴안고 싶었네 벌판에 선 나무처럼 허나, 운명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베토벤처럼 나를 울게 하였네 폭풍의 언덕처럼 나를 찢고 할퀴었네 계절 뒤에 계절이 지고 기억 뒤에 기억이 덮이고 길 잃은 시간은 여윈 손가락을 땅에 떨어뜨렸네 별도 바람도 빗물도 햇살도 변함이 없었으나 나의 질문만은 늘 그대 앞에서 길을 잃었네 쿵, 산정에 밀어 올린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졌네 산마루에 숭숭 뚫린 가슴을 걸어두고 뜨거운 간을 날마다 쪼아 먹혀야 했네 사랑아, 너는 나의 갈망이었으나 가도 가도 허망한 신기루였노라 영혼까지 쪼아 먹히는 신화의 간이었노라 밀어 올려도 밀어 올려도 다시 굴러 떨어지는 절망의 바위였노라 -시집 <사랑의 물리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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