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은숙 시인(청주) / 남아 있는 체온을 모아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7. 08:00
김은숙 시인(청주) / 남아 있는 체온을 모아

김은숙 시인(청주) / 남아 있는 체온을 모아

 

 

꽃등불 환히 밝히느라 오래 애썼다고

쓰다듬으려 다가서는 사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는 바람 한 줄기에

꽃잎 풀풀 힘없이 내려와 지상에 눕는다

 

바람 한 줄기에 마음 베인 것일까

한 잎 비명도 없이 분분히 내려앉아

식어가는 체온을 더듬는 아직 환한 얼굴이

마음 가득 들어앉아 눈을 맞추는 저녁

 

소슬한 바람도 가파르게 파고들면

주저 없이 지친 생을 내려놓는 거라고

차마 지우지 못한 마음마저 묻어버리는 거라고

지상에 누운 목련꽃이파리가

남아 있는 체온을 바투 모아 새기는 생애의 문장

 

떨림도 올림도 사무침도 속절없는 거라고

헝클어진 눈빛으로 스스로 제를 올리며

숨길 멎는 순간에 제피로 방점을 찍는

마지막 눈부신 바닥의 지문

 

 


 

 

김은숙 시인(청주) / 난독難讀의 시간

보이지 않던 마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수렁같이 깊었던 내 난독의 씨실 날실이

돋을새김으로 드러난다

헤아리지 못한 마음들

제대로 읽지 못한 생각들

외면의 차가운 순간이 살아나

심장 안쪽을 깊숙이 찌르고

비척비척 홀로 걸어갔을 쓸쓸한 걸음들이

내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오는 저녁

깊이 읽혀지는 것이 많아지자

비로소 보이는 칠흑 같던 내 난독의 시간

지워질 수 없는 시간의 무게에

휘청, 가슴 저미며 파고드는

뜨거운 뒷모습의 부답不答

-시집 <그렇게 많은 날이 갔다> 2022

 

 


 

 

김은숙 시인(청주) / 부끄럼주의보

 

 

상당산성 터널 지나 내리막길에 접어들자

푯말 하나가 들어왔다

 

부끄럼 주의

속도를 줄이시오

 

굽이굽이 급경사 급커브 길을 돌아들자

오른쪽에 또 보이는 큰 표지판

 

부끄럼주의

사고 많은 곳

 

출퇴근길 매일 보는 미끄럼 주의가

부끄럼 주의로 읽히는 여름

 

길가에 늘어선 저 달맞이꽃처럼

고스란히 어여쁜 부끄럼이라면

그래 어쩌면 속도를 줄여야 할 듯

 

위험한 급경사 급커브 굽이 길 저 언덕배기에

연노랑빛 얼굴 못 들고 고개 살짝 돌리는

그야말로 순정의 부끄럼이라면

어쩌면 어스름한 달무리 아래에서

사랑 같은 사고가 일어날 수도

 

아하 그래서

부끄럼 주의

한여름의 달맞이꽃

 

 


 

 

김은숙 시인(청주) / 매미

 

 

처절하구나 가파른 절규여

짱짱한 야생 울음으로

푸르른 존재를 증명하는

저 뜨거운 간절

 

순정의 외침 순정의 그리움이

식은 나무를 꼭 부여잡고

온몸 통으로 목청껏

소멸도 아랑곳없이 숲을 흔들다가

 

치열한 수직 울음으로

한 계절 뒤뜰을 관통하고

기어이 생애를 묻는 매미

목메는 맹목의 눈물겨운 애틋

 

 


 

 

김은숙 시인(청주) / 61년생 김은숙1

 

 

1961년에 세상에 와서

2021년 61세가 되었다

 

60년 살아왔다는 게 문득 놀라워

돌아보면 아득하고 희뿌연 날들

까마득하게 쌓인 날들의 두께가 두텁고 두렵다

 

위태롭게 건너온 사람과 시간의 협곡

휘둘리고 휘청거리며 푹푹 빠지던 사막의 지대에서

어설픈 걸음마다 푹 패인 발자국의 눈시울 뜨겁다

 

순간순간 치받고 찌르던 칼끝 뭉툭해지고

명치끝 저릿하던 선혈은 희미해져 저만큼 먼데

그리 애태울 것도 애통할 것도 없는 밋밋한 무풍지대에 이르러

지금은 노을을 마주하는 시간

 

부산스레 건너온 한낮 뜨거운 체온도 품고

뚝뚝 떨구는 지상의 눈물과 탄식 정처 없는 서글픔도 녹이며

더 붉고 넉넉한 노을의 시간에 서서

남은 날 엮어갈 손발을 들여다본다

 

61년생 김은숙 혼자 오래 걸어왔다

곧이어 어둠 내리고 캄캄한 밤이 오리니

버석거리는 손발이어도 마음 온기는 잃지 말자고 속말을 하며

언제나 그리운 평화와 평등의 지대를 생각한다

 

―시집 『그렇게 많은 날이 갔다』 에서

 

 


 

 

김은숙 시인(청주) / 입춘

​밤새 누가 울고 갔는지

공기의 안쪽이 흠뻑 젖어 있다

삐걱거리며 울려오는 땅 밑 신열과 균열

떠나가고 흩어지고 올라가고 깨어나는 것들

많아지겠다

- 시집 『그렇게 많은 날이 갔다』(고두미, 2022)

 

 


 

 

김은숙 시인(청주) / 쌀밥 먹는 시간

 

 

경기도 여주 땅을 지나다가

쌀밥집이라는 상호를 처음 보았는데

쌀밥이라는 낯익은 어휘가

한 집의 주인으로 반듯하게 서있는 게 문득 새로워   

차림표에 의젓하게 자리한 쌀밥 한 그릇 반가이 청했는데

 

보통의 이런저런 반찬으로 차려진 밥상의 중심에

마지막으로 올라온 쌀밥 한 그릇

한참 동안 밥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다가

입안 가득 담아 넣는 한 숟가락의 밥   

사십여 년 지탱해온 내 몸의 모든 것이

때마다 떠 넣은 밥숟가락에 힘입은 것이어서

내 디뎌온 발자국 하나하나가

이 쌀 한 톨 한 톨의 힘이 아닌 것이 없어서  

앞에 놓인 쌀밥 한 그릇 한 숟가락의 밥이

새삼 가슴 뜨겁게 뭉클해지는데

 

뿌리 끝 흔들리는 절망에 닿아서도 서로를 부축하여

굳건히 어깨를 결어온 벼들이 들판 가득 일렁이고

불어오는 바람도 넉넉히 품는 서늘한 깊이가

고단한 일상의 허기를 채우는 이 땅의 가을

 

입안 가득 쌀밥을 꼭꼭 씹어 삼키며

한 톨 한 톨의 쌀알들이 뜨겁게 몸을 데우는 시간

영혼의 허기도 비로소 삭아들며 푸근해지고

한 그릇의 밥 앞에서 숙연해지는 가을 한나절

생활에 지치고 발걸음 무거운 이들에게 나도

더운 김 솔솔 나는 뜨거운 밥 한 그릇 지어내고 싶다

 

 


 

김은숙 시인(청주)

1961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학교 국어교육과 및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1998)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창밖에 그가 있네』 『아름다운 소멸』 『손길』 『부끄럼주의보』 『그렇게 많은 날이 갔다』. 제13회 내륙문학상 수상. 현재 충북작가회의 부회장, 빈터·시천(詩泉) 동인회장, 내륙문학회 회원. 청원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