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시인 / 거룩한 손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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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시인 / 거룩한 손
빗방울 떨어지자 공원에서 놀던 아이들 황급히 집으로 간다. 한 아이가 돌아와 커다란 플라스틱 휴지통을 뒤집어놓고 들어간다. “빗물 고이면 청소 아줌마 힘들까 봐……” 등에 묻은 빗방울 털며 환하게 웃는 손. 어린 날 마당 귀퉁이 사금파리 놀이하다 추녀에 비 들칠 때 댓돌 위에 비 맞고 누운 고무신 젖을까 봐 얼른 뒤집어놓고 손 지붕으로 가려주던 기억 철들고 마냥 설레던 날 젖은 나뭇잎에 써 보낸 편지 뒷장 같은 그것 아침 햇살에 선잠 깰까 여린 이마 부챗살로 가려주던 그것 어느 구름에서 비 내릴지 모른다며 세상일 하나씩 덮어두는 법도 배우라던 어머니 마지막 눈 감겨드리고 오래도록 거두지 못한 그 손.
-시집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고두현 시인 / 김밥 천국
천 원짜리 한 장이면 미얀마 소아마비 아이 다섯 구하고 캄보디아 지뢰밭 삼분의 일 제곱미터 걷어 내고 아프가니스탄 어린이 다섯 명에게 교과서와 방글라데시 아이들 스무 명에게 피 같은 우유 한 컵씩 줄 수 있고 몽골 사막에 열 그루의 포플러를 심을 수 있다는데 종로1가 커피빈 화사한 불빛 그늘 반들반들 참기름 두른 천 원짜리 김밥집에서 연거푸 두 번이나 천국의 문을 넘는 나의 목구멍이여.
고두현 시인 / 그 숲에 집 한 채 있네 -물건방조어부림 2
그 숲 그늘 논밭 가운데 작은 집 하나 방학 때마다 귀가하던 나의 집
중학 마치고 공부 떠나자 머리 깎고 스님 된 어머니의 암자
논둑길 겅중 뛰며 마당에 들어서다 꾸벅할까 합장할까 망설이던 절집
선잠 결 돌아눕다 어머니라 불렀다가 아니, 스님이라 불렀다가
간간이 베갯머리 몽돌밭 자갈 소리 잘브락대는 파도 소리 귀에 따숩던
그 집에 와 다시 듣는 방풍림 나무 소리 부드럽게 숲 흔드는 바람 소리 풍경 소리.
먼 바다 기억 속을 밤새워 달려와선 그리운 밥상으로 새벽잠 깨워 주던
후박나무 잎사귀 비 내리는 소리까지 오래도록 마주 앉아 함께 듣던 저 물소리.
고두현 시인 / 돈
그것은 바닷물 같아 먹으면 먹을수록 더 목마르다고 이백 년 전,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한 세기가 지났다.
이십세기의 마지막 가을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93세로 세상을 뜨며 말했다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그리고 오늘 광화문 네거리에서 삼팔육 친구를 만났다.
한잔 가볍게 목을 축인 그가 아주 쿨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주머니가 가벼우니 좆도 마음이 무겁군!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에서
고두현 시인 / 발왕산에 가보셨나요
용평 발왕산 꼭대기 부챗살 같은 숲 굽어보며 곤돌라를 타고 올라갔더니 전망대 이층식당 벽을 여기 누구 왔다 간다, 하고 빼곡히 메운 이름들 중에 통 잊을 수 없는 글귀 하나. ‘아빠 그동안 말 안드러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 하, 녀석 어떻게 눈치 챘을까. 높은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다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걸.
-시집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고두현 시인 / 사랑니
슬픔도 오래되면 힘이 되는지 세상 너무 환하고 기다림 속절없어 이제 더는 못 참겠네 온몸 붉디붉게 애만 타다가 그리운 옷가지들 모두 다 벗고 하얗게 뼈가 되어 그대에게로 가네 생애 가장 단단한 모습으로 그대 빈 곳 비집고 서면 미나리밭 논둑길 가득 펄럭이던 봄볕 어지러워라
철마다 잇몸 속에서 가슴치던 그 슬픔들 오래되면 힘이 되는지 내게 남은 마지막 희망 빛나는 뼈로 솟아 한밤내 그대 안에서 꿈같은 몸살 앓다가 끝내는 뿌리째 사정없이 뽑히리라는 것 내 알지만 햇살 너무 따뜻하고 장다리곷 저리 눈부셔 이제 더는 말문 못 참고 나 그대에게로 가네
고두현 시인 / 백양나무 숲에 들어
나도 알몸이 된다 희고 미끈한 허리 서로 닿지 않을 만큼 이 절묘한 간격
밤 깊어 새벽 별 조는 사이
몰래 오줌 누는 처녀 옆에 빙 돌아선 울타리처럼 온 숲이 몸을 가리더니 그 속에서 가장 젊은 나무 하나 다른 나무에게 가만가만 몸 부비는 모습 밤마다 그렇게 돌아가며 한 그루씩 아이를 낳는다는 걸
백양나무 숲에 알몸으로 든 뒤 나는 보았다
왜 나무들이 저만큼의 간격으로 떨어져 서 있는지 햇살이 서걱서걱 그 사이를 벌려 놓는 한낮에는 어떻게 잔뿌리들이 땅 속에서 은밀하게 손 뻗는지
그 속에서 밤을 새운 뒤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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