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식 시인 / 사과 깎는 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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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시인 / 사과 깎는 밤
가을볕에 잘 익은 온유 하나 깎는 밤
날을 세워 끊임없이 뭔가를 자르기만 했던 칼 하루 중 가장 겸허한 자세로 단단한 과육 위에 엎드려 석고대죄하고 있다
사각사각 눈 내리는 소리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
종일 밖으로만 지향하던 선(線)을 지우고 제 안의 유순한 면(面) 살려내면서 하루의 과오를 죄 없이 해치기만 했던 살의를 반성하고 있는
공전하며 반가사유하는 칼의 희디흰 내면
댓잎 서걱이는 툇마루 달그림자 엷게 비치는 사과는 둥근 쟁반 위로 떠오르고 나는 또 누굴 죄 없이 해치진 않았는가
멈칫멈칫 벗겨진 뫼비우스의 띠 같은 붉은 껍질들 한 송이 무욕한 꽃이 되는 저녁
고요해진 등불 아래 멀리 있던 어둠들 불러 앉히면 밖을 향해 무수히 적의만 세웠던,
사각사각 내 죄도 둥글게 자복하고 싶은 밤
김영식 시인 / 느티우물
느티는 제 몸속에 우물 한 채 가지고 있는 거라 동네 어귀서 첨벙첨벙 종일 그늘을 길어 올리는 고목 심심한 공터의 등짝에 어이쿠! 등목도 해주면서 아프리카 마오리족 치마를 빌려 입은 듯 나뭇잎 얼기설기 엮은 그늘 자리끼 가로 자글자글 멸치떼 처럼 몰려와 붐비는 햇살 매미소릴 멍석으로 깔아주는 부지런한 느티의 어깨너머로 아이들이 흘러오고 한 낮의 고요가 흘러오고 수양산음水楊山蔭이 강동 팔십 리라도 하려는지 더위 먹은 자동차 지붕 위로 그늘 두어 바가지 뿌려주면서 헐떡거리며 찾아온 개들에겐 옛다! 그늘 한 양푼이 씩 고봉으로 내어주며 퍼내도 출렁출렁 다시 고이는 그늘 암만 가난해도 손 큰 고모처럼 암만 나눠줘도 커지는 오지랖, 속으로 지붕이며 골목이며 동구 밖이 흘러왔단 다시 흘러가 지붕이 되고 골목이 되고 동구 밖이 되고 느티의 무릎을 베고 누워 나는 킬킬, 잠든 고양이 수염을 잡아당기는 그늘을 보다가 그늘을 아이스게끼처럼 물고 날아가는 새들을 보다가 저녁이 되자 남은 그늘을 쓸어 담아 제 품으로 다시 집어넣는 저 알뜰한 느티의 하루 느티는 제 몸 속에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 한 채 가지고 있는 거라
김영식 시인 / 주상복합단지를 방문하다
주상복합단지 엘리베이터 덜컹, 관 뚜껑 같은 문이 열리고
어서 오십시오 여기는 납골당, 여러분의 공동묘집니다 방문하여주신 고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부터 장례용품 세일 ,기간 느긋하게 둘러보면서 새롭게 단장한 저희 묘실 내부를 감상하세요 무덤 안에선 뛰거나 소리지르면 안 됩니다 잠자는 시체들이 벌떡벌떡 환생할지도 모르니까요 스위치를 함부로 누르지 마십시오 당신의 영혼이 영원히 갇혀버릴 수 있습니다 지상1층은 잡화가게 귀고리나 반지 같은 장신구들이 유물로 진열되어 있습니다 반짝이는 것들은 언제나 당신의 전생을 대변하는 훌륭한 부장품이 되어 줄 겁니다 2층부터 5층까지는 옷가겝니다 수 만 벌 수의가 오랫동안 여러분을 기다려 왔습니다 우아하게 부패하기 위해선 수의는 아무래도 메이커가 좋겠죠 여러분의 영혼을 운구해온 상여는 지하 주차장에 안전하게 주차되어 있습니다 지상 1층입니다 문이 완전히 열린 후 천천히 나가세요 오늘도 즐거운 쇼핑 되십시오 여기는 여러분의 공동묘집니다
등 뒤로 스르르 관 뚜껑이 닫히고 돌아보니 내 몸이 없다 글쎄 내가 언제 죽은 거지?
김영식 시인 / 숟가락寺院
저녁의 숟가락 이 작은 분화구를 보라지 불빛들이 허기처럼 몰려든 아비규환의 점철을 보라지 뒤집으면 무덤이 되었다가 다시 뒤집으면 아귀 같은 입이 되었다가 나는 종일 숟가락을 위해 헌신한 사람 숟가락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숟가락교敎의 맹신자 채워도 금방 주린 짐승처럼 달려드는 욕망의 눈부신 블랙홀을 보라지 굽은 손잡이 위로 한 사내가 귀가하고 잘그락거리는 불빛을 집어삼키며 마침내 배가 부른 웅덩이가 지어 올리는 허기의 신전 한 채 그 오래된 밀교密敎를 들여다보면 어느새 숟가락이 나를 퍼먹고
김영식 시인 / 옥상 혹은 부록
옥상이 있는 집에 살았다 악다구니와 곱삶은 보리쌀과 버짐 핀 아이들이 젖은 빨래처럼 펄럭거리던, 창고 위에 덤으로 얹힌 집의 부록 학원이며 여고시대는 부록이 많았다 부록이 많은 잡지를 찾아 헤매던 날들 위로 청춘의 덧니 같은 옥상이 있었다 옥상의 가슴에 보름달 같은 구멍을 내고 세고비아, 바람의 현을 켜던 저녁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날이 많아질수록 내 키는 오동나무 옹이처럼 쓸쓸하게 자랐다 마당의 부록 같은 오동잎 파피루스에 내 고독의 자서전을 기록하고 싶었지만 휘이익! 골목 위로 서툰 휘파람을 날리면 슬레이트 표지로 잇댄 지붕과 지붕 사이로 옥상의 사생아들이 섬처럼 아득하게 흘러오곤 했다 가끔씩 방정식 같은 계집애들과 사랑을 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간 계집애들은 “이딴 옥상 따윈 다신 올라오지 않을 거야”라며 주먹을 먹이고 떠나갔다 그럴 때면 옥상의 페이지마다 킬킬대며 별빛들이 쏟아지곤 했는데, 한 번도 본 권本券이 되지 못했던 그 많던 부록의 시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옥상이 있는 집에 오래 살았다 녹슨 덤벨과 거미줄과 도둑고양이가 낡은 목록처럼 펼쳐져 있던,
김영식 시인 / 원근법의 완성
그러니까 이건 새로운 원근법에 대한 얘기예요
한때 일만 개의 팔과 일만 개의 다릴 가졌다는 눈사람 아버지 조금씩 어제 쪽으로 멀어지고
집으로 오는 골목 어귀엔 날마다 사나운 호랑이가 출몰해 팔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팔 하나 잘라주고 다리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다리 하나 잘라주고
오늘처럼 눈 내리는 날엔 뒤란 대숲 우듬지에서 으적! 으적! 뼈 씹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글쎄, 눈의 종족들은 왜 제 몸 속에 단 하나의 소실점만을 가지는 걸까요? 겨울의 구석에 뭉쳐져 차츰차츰 내일 쪽으로 녹아내리고 있는 눈 가계의 족장族長, 구겨진 밀짚모자를 씌우고 비뚤어진 코를 세우고 깨진 거울을 꺼내 보여주고 싶지만
그렇게 비구도적으로 앉아 있지 좀 말아요 꽃피는 봄날을 위해아버진 찬란하게 사라져야 하잖아요 그러니 이젠 없는 다리를, 없는 팔을, 애써 꺼내려하지 말고 그렇게 자기연민으로 온 몸을 둘둘 말지 말고 지린 오줌처럼 마르지 말고 제발
한 때는 자작나무숲 위로 난분분 휘달리기도 했다던 일만 개의 계절과 일만 개의 구름을 거느렸다는 설인雪人아버지
이렇게 작아져서 멀어지면 우린 또 어느 겨울에 각혈처럼 해후할 수 있나요?
근데 이건 전혀 낡은 원근법에 관한 얘기예요
김영식 시인 / 골목이 되는 법
골목은 어떻게 해야 골목이 되는지 알고 있다
길모퉁이, 껌딱지 같은 구멍가게 펼쳐 놓고 늙은 감나무 한 그루 공터에 세워 놓고 빈집 마당엔 채송화 몇 송이 그려 놓고 고양이 울음소린 담장 위에 얹어 놓고
골목은 어떻게 해야 옛날이 되는지 잘 알고 있다
-동시집 《민들레 우주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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