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희 시인 / 달, 쥘부채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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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시인 / 달, 쥘부채 당신처럼, 나를 길들이는지 실타래 산길은 왼쪽으로 감았다 풀고 다시 오른쪽으로 감으며 밤하늘로 이끈다 별마로 천문대, 하늘 높이 지어놓고 은하수 포획할그물을 던지는 사람, 누굴까 그도 누군가에게 달을 따다주고 싶었나 보다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걸려 있는 당신, 마음을 접는군요 어이하여 세상 모든 것들은 피었다 지는 꽃인지 달빛 사라진 어둠속 적막으로변주되는 달맞이꽃에 가늠해보아도 그것도 아닌, 헤아리는 저의에 어둠이 잠기고 내가어둠으로 스며들쯤 홀연히 다시 펼치는 운명처럼, 접었다 펼쳤다 달빛에 걸려 넘어진 생애가 개기월식 때문만은 아니게 어떤 사상처럼자아내는 미묘함과 검고 푸른 여명과 어느새 동쪽하늘 불사르는 태양과 내가 하나 되어 이 땅의율법을 초월한 듯한데, 동강줄기를 따라 물안개 피었다 지는 저 치명적 풍경은 아직 길들일 것이남아 있다는 것인가
이원희 시인 / 능소화
담장 안 밖을 끌고 당겨 하나의 풍경을 만드는 능소화 금간 담장에 걸터앉아 갈라진 틈을 봉합하고 있다 한때 저 담장의 몸이었던 적 있었다 삶과 소통하지 못하고 벽으로 서서 근심으로 금 그어지던 몸 견딘 것들과 견뎌야할 것들 사이 살아온 방식과 살아갈 방식 사이 바람직한 세계와 나 사이 느끼지 못한 틈새의 거리지만 비애 쪽으로 넘어지다 간절함으로 곧추세우며 놓았다 붙잡은 생사生死거리만큼의 틈으로 금 그어졌다 나를 꿈꾸게 하는 것은 저 꽃이었다 어슬녘에 걸터앉아 한 송이 피워 열 송이 피워 수백 송이로 담장과 하나되어 경계를 지우는 능소화 구름도 연연하던 시간을 포용하며 풍경을 아우르고 있다
이원희 시인 / 아! 아리야 -강아지
한나절이 길다했던 너 그리 멀리 가버렸니 가슴이 먹먹해서 몇 밤이 그냥 갔다 너네도 천국이 있다면 내 너를 위해 기도하마
아빠가 보고파서 그 곁에 갔더랬니 살갑게 아끼던 너 아마도 반겼을 거야 쬐그만 너의 자리가 그리큰 줄 몰랐다
-《시조미학》 2020. 여름
이원희 시인 / 야인
`갓'이라 힘주어 말할 때 날이 아니라 각이 선다
삶의 무게를 계량하는 일은 자신을 기울이는 각도이므로 유연한 모색이라 하겠다
히말라야의 흰 지붕 아래 피붙이를 두고 온 쓴 걸음,
주저앉은 한 세월 까맣게 잊고 사는 들풀 사이로 족적이 확장된다
오늘을 사는 까닭은 갑옷보다 거친 세상의 통행료를 풍미로 대신하기 위함이었다
변방에 부는 바람을 맞선 잘 손질된 검, 힘줄이 불끈하다
바람이 잘려 나가면 곧 꽃이 필 것이고 범상치 않는 향취는 미각을 부를 것이다
'갓'이라 힘주어 말할 때 맛깔난 각도가 곧추선다 참! 흐트러짐 없는 저항인 것이다.
이원희 시인 / 빗방울 타이핑
새벽녘 머리맡을 두드리는 소리 불면의 얕은 잠을 파고든다 아리게 박히는 비의 타이핑 소리는 자기만의 은밀한 파동으로 저쪽, 그리움으로 밀고간다
1 컴퓨터는 외로움이다 외로움이 전원을 누른다 슬픔의 전류 온몸을 돌아 얼굴 밝아지는 모니터, 전류는 내 몸으로도 흘러 투둑 투둑 손은 빗방울이 된다 너의 이름의 젖은 철자, 순간, 텔레포테이션*이 이루어진 듯 그리움으로부터 걸어 나온 사람의 표정과 음성과 잡을 수 없었던 시선이 내 앞에 선다 얼굴이 몸이 만져지는, 만져지지 않는 이미지는 스쳐지나가는 그림자같이, 읽고 난 후 내일을 다운로드 받지 못한 채 미세한 입자로 날아가 구름이 된다
2 물질은 고무줄 같은 끈으로 이루어져 어떻게 진동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입자로 나타난다**고 한다 내 몸 안의 끝없는 진동 달려가 볼까 기다림 속에 머무를까 수없는 파도로 일어섰다 가라앉으며 진동하는 마음은, 갈등의 다양한 입자로 비 냄새 비릿한 공간 속을 떠다닌다
더욱 빠르게 빗방울 타이핑을 한다 쏟아져 내리는 조합되지 못한 문자들 바닥에 부딪치며 튀어 오르는 열망들을 또다시 억누르며 주전자에 빗방울을 붓고 찻물을 끓인다
* Teleportation - 팩스의 원리와 같이 물체를 읽어 멀리 떨어진 곳으로 공간 이동시키는 기술 **초끈이론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단위를 점이 아닌 끊임없이 진동하는 끈으로 보고 우주와 자연의 궁극적인 원리를 밝히려는 이론
이원희 시인 / 푸른 음악
어느 정점으로 수렴하고 있다 5월 생강나무 꽃망울 터트린 산등성이 중仲 임林 남南 무無 황潢 태汰 푸른 음률을 높이고 있다 시간의 걸음마다 짙어지는 빛의 선율, 綠音 스며들어 고요히 차오르는 슬픔 슬픔 속에 환희가 숨어 있었나 푸른 도취가 일어선다
떡갈나무 잎으로 발음하는 바람소리 한 음 높은 솔잎의 음색 중(氵仲)음으로 끼얹는 숲의 내음새 소쩍새의 하늘 청명해지는 산등성이에 또 한 소절의 화음이 불어간다
잎이기 전에 저 푸른것들은 깃발이었나보다 지난밤 내린 빗소리를 머금고 둑 터진 방죽으로 밀려오는 초록 결기 위에 마음을 올려놓고 같은 주파수로 공명하면 내 정신의 정점은 신갈나무 푸르름에 다다를 수 있을까
1)우리나라의 음계로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 모두 12음률로 되어있다. 기보법에 표기할 때는 머리글자만 따서 황, 대, 태 등으로 사용하며 한 옥타브 위 음은 앞에 물수 변(氵)을 붙인다.
이원희 시인 / 허기진 미학적 거리
서정동 간이역에 고슴도치 생각이 움츠리고 있다 멀리 두는 눈길이 흰 고독의 레일과 마주치는 끝의 헛것, 그 곳에 이를 이 길
다가올 몇 킬로미터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몇 미터의 슬픔 추억에 찔려 아픈 몸의 통각은 발을 내딛기도 전에 끝을 계산한다 끌어당기던 눈빛도 마음을 둥그리던 목소리도 시간은 바싹 말려 가시로 만들었지 몸의 가시는 관심은 간섭으로 간섭은 관습으로 아린자리에 상처를 내는 가까이 할수록 멀어진 거리 멀어질수록 더욱 멀어지는 거리
얼마만큼의 거리여야 할까
X자처럼 교차한 후 다시 멀어지는 길이 아닌 1.435*미터 거리만큼 평행하다 소실점을 향해 두 길이 하나 되는 너와 닿지 않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진정 아름답다는 오랜 생각의 바퀴를 굴려 구한 답, 허.기.진.다 콧날 시큰거리는 냉기가 플랫폼을 맴돌자 생각의 깊이를 가로지르는 싸락눈, 바람과 함께 문득 고요해지면 쓸쓸함은 바람 언저리에 서는데 자디잔 슬픔의 자갈 위
가로 받쳐 두 길 이어주는 침목
*1.435m : 철로와 철로간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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