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승남 시인 / 멈춘다는 것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8. 08:00
이승남 시인 / 멈춘다는 것

이승남 시인 / 멈춘다는 것

 

 

빨간 신호에 따라서

걸음을 멈춘다

 

멈추는 동안 시간이

굴러가는 것을 본다

 

시간은 저울처럼

공평한 것

 

때론 신호등처럼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생각을 멈추고 고요에

깃들일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

 

멈춤은

모든 걸 키워내며

너그럽게 공경하는 따뜻한

마음씨앗

마음 안의 시詩이지 않을까

 

유통기한이 없는 매일의 페이지에

은유를 길어 올리는 소담한 맛의 기도

향기는,서로 존재하므로 가능하지요

 

 


 

 

이승남 시인 / 반성

 

 

회칠한 듯 숨 막히는 허공 속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

 

어쩌나…

어스름 해 걸음이 고목처럼 버티다

온전하지 못한 채 넘어가고 있다

 

세상에나 이렇게 엉망인 환경에

직면하다니

흔들리는 지구를 달 뒷면으로

가두고 천천히 초콜릿을 먹어야하나

목 캔디를 먹어야하나 심각한 고민인데

비에 젖어 표류하는 안개 몽환 속에 비비적거리고

 

채마밭 언저리에 온몸으로 바닥을 스캔하며

뼈 없이 거치른 한 생을 살아내는 민달팽이 떼

저들의 오체투지를 삭제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

생각의 꼬리는 너무 길어 삭아가는 고무줄처럼

곧 끊어질 것 같은데

 

달빛 고른 밤

유년의 뜨락에서 보던 하늘이 하도 고와서

눈이 시리던 그 날 그, 고아한 지난날들이

가슴 먹먹하도록 그리운 건

다시 깨끗한 심장을 가져 보고 싶은 떨림

그리고,

우린 안녕해요 라고 인사하고 싶은 거

 

 


 

 

이승남 시인 /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가다 살아나는 것

살아나다 죽어가는 것

모두가 하나의 실체인 것

 

액자 같은 테두리에 갇혀 온전히 내어 주고

틀 안에서 부화되어 나비가 되는 것

 

세상이 숲처럼 디자인되길 바라는 건

나만의 추상일까

썩은 사과의 흠결을 싹둑 잘라내고

완전한 사과를 먹어야 하는 거

그건 너무 고독하지 않은가

 

꿈틀꿈틀 살아내는 길

자아로 오르는 지름1밀리미터의

시작점이어도

매일 신선하게 출발할 것이다

 

 


 

 

이승남 시인 / 사는 맛

 

 

눈발이 그치고 거리로 나섰다

경사진 아스팔트길 깨진 모서리에

노란 민들레가 계절을 잊은 채

다소곳 피어있다

 

스치기만 하여도 살갗이 벗겨질 것 같은

날카로운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노란 꽃잎

온전한 마음을 심는 자리엔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나 보다

 

순수한 바람이 분다

마셔보면 알싸하고 상큼한 맛

자꾸만 그 순수함에 이끌려 길을 걷는다

발걸음을 멈추고 동백나무에 등을 기댈 때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민 햇볕은

마치 유년시절 동무와 술래놀이와 같구나

 

붉은 놀이 서녘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마법에 홀린 듯 하루가 지나는 길목에

초록지붕 오 요안나 할매 집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부엌문 틈새를 비집고 새어 나온다

음,둥근 뚝배기에 배춧잎이랑 얇게 저민 두부 대파 송송

보글보글 끓고 있나보다

살아가는 것 이와 같은 맛일 게다

 

맛의 길을 따라 걷고 걷다보니 어둠이 묵묵히 내려앉는데

문득 구름등을 타고 저기 고비高飛로 가야하는 길을 생각한다

 

구수하고 튼튼한 맛의 길을 찾으러.

 

 


 

 

이승남 시인 / 그의 힘으로 사는 것

 

 

푸른 언덕위로 불끈 솟아오르는 찬란한 빛

우리네 오가는 길목으로 제 마음 다 부려주고

오직 침묵으로 다가와 주는 뜨거운 힘

천년이 흘러도 그곳 그 자리에

지상의 모든 것들을 지켜내는 정렬의 힘

 

가끔 시커먼 먹구름이 세상을 가려도

묵묵히 그리고 따스히 얼굴을 드러내는

인자한 힘

 

그의 힘이 있어 살아가는 생명들

그의 힘이 주관하기에 우린 사는 것

잠시,

머물다 가는 우리는 그저 작은 겨자씨

그의 빛으로 싹트고 살아낼 때

 

세상을 멋들어지게 안아주고

커다란 웃음 한 보따리 품은 온정 다

쏟아 주곤

천천히 고요히 붉은 잠속으로 들지만

그 우직한 힘은 내일도 모레도 영원할 것이며

 

간혹 울컥 가슴에 샘을 파는 날이어도

새 아침 웅크린 안개 속을 넘어

빈칸으로 그의 환한 빛이 비추이면

고요 속에서 심장이 쿵,쿵 뛸 것이다

 

 


 

 

이승남 시인 / 텃밭

 

 

푸석한 흙들로 가득했던 작은 텃밭

귀퉁이엔 겨울에 심은 상추가 파랗게

자라주어 봄날 식탁이 풍성하고

남은 공간은 오이며 야채를 심어

바람 볕 물을 버무려 뿌려 주니

파릇한 은율들이 돋아나네

 

고단한 일상에 상큼한 맛을 양푼에 담아

다글다글 끓는 된장찌개를 곁들여

한 입 먹으면 소멸 되어가던 쉼표가 놓이고

텃밭으로 삶의 오감이 밥상위에 가득하네

 

아직 가꾸어야 할 자투리 텃밭

소소하고 심심찮은 벗이 되어 가리니

볕 좋고 스치는 바람이 달달한 오후13시30분

해바라기 꽃술에 앉은 벌과 나비도 고요하다

 

 


 

 

이승남 시인 / 지금이 좋다

물살이 유유히 흐르는 오후

맨발의 청춘들 다정히 걷고

송림 안 가득 가을이 머물러 앉으니

향기 나는 이야기 오순도순 무르익어 갈 때

익혀지는 시간에 이끌려 자꾸만 맴돌던 생각

분명 어린이였었는데 이렇게 익어갈 줄은 몰랐지

가슴이 가을 산처럼 발갛게 활활 물들며 타오른다

강변 옆 재첩국집

인정 있게 내놓는 뜨끈한 애호박전

달콤 짭짜름 맛 한 입 먹을 즈음

오늘 잡았다는 재첩국 한 상 내놓는다

오돌오돌 씹히는 재첩이 제맛이라

부추 잎 둥둥 띄워 초록이 물들어

더 한 그 맛이 일품이라

가을을 송두리째 먹는 이 맛에

타던 가슴이 이내 가라앉는다

이 계절이 다 가기 전

다시 맨발의 청춘으로 강변 숲을 찾으리라

보시니 참 좋았다는 진리를 알게 해준 말씀 따라

좋은 생각만 한아름 안고서

 

 


 

이승남 시인

강원도 횡성 출생. 2010년 국립한경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졸업. 2010년 시 전문 계간지 《시산맥》 제2회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물무늬도 단단하다』 등, 한국문인협회한회원,사단법인한국경기시인협회,수원문인협회회원,가톨릭문인협회회원. 동시 짓기와 논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