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용 시인 / 이름을 지운다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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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용 시인 / 이름을 지운다
비가 조금 날리더니 잎이 붉어진다 바람이 수선스레 나무에 몸을 비비고 나자 놀란 잎이 하늘을 한줌씩 움켜쥐고 떨어진다 플라스틱 잔에 소주를 붓고 망연히 무덤을 본다 무덤 위에도 참나무 잎이 조심 내려앉는다
그렇게 너는 거기 누워 있다 세상사 다 그런겨, 네 목소리도 잠겨있다 여름내 무성했던 잔디와 풀 네 차가운 입김으로 등걸불처럼 메마르고 그 뜨거움 위에 나는 맑은 소주를 뿌린다...
-시집 『나나 이야기』에서
정한용 시인 / 빈 자리
며칠 전까지 꽃잎 날리던 나뭇가지에 지금은 연록 잎사귀가 꽂혀 있다. 향기 머물던 자리엔 누군가 서성인 발자국이 얼룩덜룩하다. 오래전 어머니가 상추 가꾸던 텃밭에 오늘은 내가 쑥갓을 심는다. 흙에 버려져 반쯤 묻힌 플라스틱 통에서 민들레가 피어났다. 숲으로 이어져 느릿느릿 산보하던 길에는 어느새 최신형 전기차가 다닌다. 묵은 원한으로 쏜 총알이 순간 멈춰, 노래가 되기도 하고 격렬한 호소가 되기도 한다. 어디에도 빈틈은 없다. 꿰맨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어제의 갈피를 오늘이 뚫듯, 오늘의 간극은 내일의 에테르로 메꿔진다. 꽃 진 자리에 곧 새똥 같은 열매가 돋으니, 지워졌다 새겨지는 오랜 내력이 인류세가 지난 다음에도 계속될 것 같다. 그러니 지금 헐렁헐렁한 틈도 참을 만하고, 내가 곧 지워져도 괜찮다. 고개를 끄덕끄덕, 살래살래, 갸우뚱…… 다 좋다.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1년 5월 발표
정한용 시인 / 애절양哀絶陽
말라버린 화분 하나 뒷뜰에 버려두었네, 여름 지나고 또 몇 차례 비가 오고 그 죽은 가지 밑둥에서 새 잎이 돋는 것이네 고사리처럼 솟아난 손가락 다섯개 그 부드러운 끝에 내 무딘 손이 닿았을 때,
당신은 혹시, 어둡고 습기찬 날들의 저편으로부터, 불멸의 감옥으로부터 온, 혹시 당신은, 거세당한 말들이 뛰어다니는 고독의 들판으로부터, 굶주린 개미와 짐승들이 뒤헝클어진, 20세기의 끝으로부터 온,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올라* 스스로 뿌리를 잘랐던 것이 옛일만은 아니더라고 마지막 남은 씨톨까지 먼저 까먹는 세상 말없는 말로 스스로 혀를 자르거나 약속처럼 사람들 사이에 벽을 세워놓고 어찌 시 한편 끄적이는 것으로 蠶室宮刑을 달래랴 드러워라, 이 땅에 눕힌 내 그림자 2백년 길이로 깔려 여기 닿네 사랑도 불감증으로 더럽혀진 지금, 끝자락에 나는 거꾸로 매달려 있네
죽은 뿌리 다시 솟궈내는 저 아름다운 울음의 극치,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스산한 먼지 속에 돌아서네
* 다산의 애절양 「三代名簽在軍保」
정한용 시인 / 그 향기 바람에 날리고
화초라곤 쥐뿔도 모르는 내게 오 년째 숙식을 나눈 친구 하나 있어 이름 없는 蘭 한 촉 작은 토분에 솔 껍질 채우고 뿌리 박아 잎도 실한 편인데 이놈이 죽어도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이야 나도 오기가 있지 어디 두고 보자, 지난 겨울 얼어뒈지든 말든 베란다 구석에 그냥 처박아뒀는데 그러고 매운 바람 불었는데 바람의 올과 결이 한층 부드러워진 초봄 입구 어데선가 자꾸 냄새 나는 것이야 내 쭈그러들고 피곤한 영혼의 틈새로 자꾸 향기 날려오는 것이야 하,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놈 내게 사과의 뜻인지, 인동의 저력을 과시함인지 아주아주 조그만 꽃 서재랄 것도 없는 내 공부방에 들여놓자 내 손바닥만한 우주가 꽉 차는 것이야, 매콤한 그 향기 내 몸을 덥히는 것이야
-시집 <나나이야기>에서
정한용 시인 / 적멸
스무 해 전에 보낸 편지에 스무 해 지나 메일로 답이 왔다
알 수 없는 일, 겨우겨우 가는 목숨을 어찌어찌 이어오던 난 화분에 꽃이 달렸다
모든 목숨은 물같은 그리움이거나 빈집을 흐르는 울림이거나 상처의 흔적이거나
정한용 시인 / 우레를 뜯어먹다
비는 소리부터 온다. 무거운 공기가 슬쩍 들어올려지며 바람이 먼저 기별을 한다. 남태평양에서 먼길 온 바람 이 북서쪽 몽고 바람과 만나면서 오랜 해후의 눈물을 뿌린다. 일 년 만일세, 흐흐흐, 자넨 늘 그렇구먼, 스스스, 나도 이젠 늙었지, 크르르, 소리가 먼저 오고 눈빛이 마주치고 기어코 하늘이 팍 쪼개지면서 비가 내린다.
탄력적이야, 우리는, 사분의 삼박자야, 왈츠야, 요즘은 더 빨라졌어, 랩이야, 혼자 중얼거리는, 말하자면 독백이야, 그것도 음표가 되지, 현 위에 놓인 빗방울이야, 물론 꼬리도 있고, 꼬리뿐이겠어, 모든 지워지는 것은 흔적을 남기듯, 우레 꼬리에는 열매가 달려, 뜯어먹는 빵이야, 옥수수 식빵, 잘 구운 페이스트리야, 잘게 찢어서 먹는 거, 손으로 뜯어먹는, 개미처럼 갉아먹는, 우리들 죄지은 몸을 정화시키는 반찬이야, 우레 소리는 가라앉은 먼지, 도시 한복판을 점령한, 그 먼지들을 흔들어 깨우지, 마구 찢어내지, 그래서 불이야, 사랑이야, 그리움 같은 거, 물론 눈물이기도 해, 때론 질투, 고독한 저주이기도, 침묵이기도 하지.
비는 벽산아파트에도 내리고, 경부고속도로에도 내리고, 측백나무에도 내리고, 탄천에도 내리고, 용인 공동묘지에도 내리고, 우레소리에도 내리고, 내가 먹는 숟가락에도 내리고, 우레를 뜯어먹는 내 밥통에도 내리고, 우리 애인 손수건에도 내리고, 데리다 〈그라마톨로지> 260쪽에도 내리고, 플로리다 혜신네 담벼락에도 내리고, 달 어두운 쪽에도 내리고, 태양 흑점에도 내리고, 은하수에 이르러 퍽퍽 내리고, 내년에도 내리고, 2058년에도 내리 고, 세상 저편, 검은 눈에도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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