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화 시인 / 차가운 잠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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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화 시인 / 차가운 잠
꿈속에서 세차게 따귀를 얻어맞았다 새벽이 통째로 흔들렸고 흔들린 새벽의 공기를 되돌려놓기 위해 전화벨이 울렸다
나의 눈은 동그란 벽시계에 나의 눈은 병상의 엄마에게 긴 복도를 따라 걷지만 복도와 두 눈을 맞출 수는 없다
일주일 사이 꽃이 졌다 여기저기 팡팡 사진이 터지고 맘껏 담배 연기를 품었는데 나는 왜 빠져나가지 않나
고장 난 시계를 어떻게 할까 혈관을 따라 울리는 피의 음악을 또 어떻게 할까 오래전에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살비듬 같은 것들 내가 옷처럼 편안하게 입고 있는데
거울 속에는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이 있고 할머니도 아줌마도 아이도 아닌 엄마가 희미하게 손을 뻗는다
이백 년 후의 차가운 잠에서 깨어나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다정한 연인이 되어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케이크를 푹푹 떠먹을까
환멸과 동정의 젖꼭지를 몰로 거침없이 이 세계를 생산할 수 있다면 차가운 잠에서 깨어나
이근화 시인 / 엔진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피를 흘리고 귀여워지려고 해 최대한 귀엽고 무능력해지려고 해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지 않고 달려보려고 해 연통처럼 굴뚝처럼 늘어나는 감정을 위해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울어보려고 해 우리는 젖은 얼굴을 찰싹 때리며 강해지려고 해
이근화 시인 / 칠레라는 이름의 긴나라
엉거주춤 앉아서 지도를 들여다봅니다 칠레라는 이름의 긴 나라가 있습니다 마법사의 오랜 손처럼 길고 구불거립니다 이곳에서 부는 바람은 막연한데 마법사는 자꾸 커다랗고 흰 새를 날려 보냅니다 그러니까 지도 보기는 나의 취미인 셈이지요 오늘은 긴 나라를 모두 살펴봅니다 긴 나라의 뉴스를 듣습니다 당신의 나라는 오늘 날씨가 좋군요 나는 바람의 행로를 알지 못하지만 지도 위의 긴 나라들을 짚어 봅니다 흰 새들의 무리가 한꺼번에 날아오르고 하늘에 커다란 글씨를 매달지만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릴 뿐 나는 이곳의 그늘을 좋아합니다 길고 아름다운 나라에서 흩날리는 당신의 머리칼과 그 바람에 대해 이제 말할 차례입니다만 그 바람이 너무 가깝게 나를 통과하므로 다시 주도면밀하게 따져 보고 있는 것이지요 칠레라는 이름의 길고 아름다운 나라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지도는 나의 착각입니다 저기 나뭇잎 하나가 떨어집니다 지도는 잠시 접어 두고 밖에 나가서 나뭇가지라도 흔들어 보겠습니다 길고 아름다운 나라로 가겠습니다
이근화 시인 / 오디
가판대에 오디는 검다 바구니마다 탱글거리는데 고요하달지 응큼하달지 두어 개 집어먹으니 손톱 끝이 까매지는데 까매진 손을 어디다 내밀겠어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배가 고프다 아니 부르다고 해야 할까 검은 것은 눈 붉은 것은 입 노란 것은 귀라고 할까 사람들은 반쯤 열려 있어 들어가기 쉽다 튕겨져 나오기 일쑤지만
표정은 제각각 서로 다른 기억을 끄집어내며 활달해진 사람들 오디를 본다 망한 가게는 휑하니 볼 게 없다 수북한 먼지와 찢어질 듯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갈수록 태산이다 기대와 실망이 엉켜 길을 만들고 봉지는 주렁주렁 손가락 사이에 엉킨다 웃는 듯 우는 듯 말없는 이들이 고추를 담고 오이를 쌓고 쪽파를 다듬는다 아직 그 자리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중이었을까 오디라 말하겠지만 숨은 이름들이 더 많다 5월이고 볕이 토해내는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마음은 잠잘 줄 모른다
이근화 시인 / 미역국에 뜬 노란 기름
친정 엄마가 미역 다발을 끌어안고 오셨다 미역과 엄마의 키가 거의 같았다 발을 질질 끌었을 것이다 미역도 엄마도 등산 배낭에는 얼리지 않은 쇠고기 덩어리가 시뻘건 물을 흘리고 있었다 택시도 버스도 마다하고 쇠고기는 제 살에 다리를 달았을 것이다 여섯 개의 피곤하고 절룩이는 다리들이 저녁의 식탁에 고요히 놓인다 미역국에 뜬 노란 기름은 눈물 같고 고름 같고 죽음 같다 흐르지 않고 동그랗게 고인다 잊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꿈속의 연인들처럼 고독한 순례자처럼 성지에서 터지는 폭탄처럼 폭력적이고 슬프다 한 방향으로만 한 방향으로만 오늘 꿈속에서 당신이 바짝 마른 얼굴로 앓고 있었다 당신을 위해 미역국을 한 그릇 떠서 아슬아슬하게 옮겼다 뜨거운 손가락을 어쩌지 못해 발을 동동거렸다 서둘러 가기에 다리가 부족했다 당신은 식탁이 없고 숟가락이 없고 미역국의 기름은 뜨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내 어머니의 노란 얼굴을 보지 못하고 여섯 시가 된다
이근화 시인 / 인터뷰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가을에 관한 것일까요 가을을 위한 것일까요 가을은 모릅니다 질문을 위한 입술처럼 피를 흘립니다
공중부양 수신제가 수직낙하 치국평천하 나뭇잎의 얘기입니다 몸과 마음과 국가는 쓸모가 없습니다
그걸 꼭 쓸어야 합니까 가을입니다 위생과 청결을 위한 비질일까요 정녕 쓸모없는 질문에 매달립니다
빗자루에 매달린 경비원들은 여유가 있습니다 소리 없는 질문에 희미하게 웃습니다 보람, 글쎄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날부터 야간경비원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낙엽들을 인터뷰한 결과입니다 밤의 낙엽들은 상처 난 입술 같고 침묵을 즐깁니다
살이 오른 낙엽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바스락거리며 다 뛰쳐나갈 듯 하지 않습니까
바닥입니다 가을입니다
우리의 쓸모는 비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쓸어내고 있는 것은 낙엽이 아닙니다
공중부양 수신제가 수직낙하 치국평천하 이렇게 나란히 적어 놓고 무엇을 기다립니까
이근화 시인 / 갑자기 죽은 표정
한 박스 가득 구천 구백 원 냉장고의 환한 어둠 속에서 잠자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다 싹이 났다 여러모로 피곤했다 감자는 거대하게 자랐다 싹 튼 감자는 죽은 것처럼 보였다 너무 크게 자라서 냉장고 서랍을 뚫을 듯 힘찼다 힘차게 죽어 갔다 메롱메롱 감자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이근화 시인 / 우리의 망치질
못도 없는데 벽도 없는데 팔이 있어서 두 팔이 심심해서 하루가 길어서 노을이 지도록 (어둠은 물러서지 않아요)
네가 물러선다 들어가는 건 내가 아니지만 탕탕 울린다 총소리는 아니지만 사랑이 비좁다 신념은 아니지만 (희망은 없지만)
배워서 아는가 손에 쥘 것이 필요했다 숨은 그림자 내가 네게서 멀어진다 마음 속 꽃이 피어요 튕겨져 나오는 미래 (한 송이는 아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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