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푸른 시인 / 어둠의 포자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9. 08:00
정푸른 시인 / 어둠의 포자

정푸른 시인 / 어둠의 포자

 

 

 골목의 외피는 사람이다 휘장이 들춰진 포장마차 안에서 냄비가 끓고 있다

 밤이 깊을수록 진하게 달여지는 사람 냄새가 길의 체액이다 눈물처럼 짭쪼롬하고 토사물처럼 시큼하다 개와 고양이가 버짐처럼 발자국을 남긴다 쓰레기 더미에 빠져있는 한 발을 들어 악수를 하고 뺨을 부빈다 짖는 것과 우는 것은 단지 발성의 차이, 슬픔은 구멍 난 자루처럼 입을 벌려 자신을 흘려 보내는 것이다 누군가 흘리고 간 슬픔이 길 가장자리에 이끼로 소독하다 축축하게 젖어있는 이끼가 사람들의 눈에도 입에도 무성하다 익명의 체취를 우려낸 진한 냄새가 살아 움직인다 다시를 낸 멸치처럼 휘어진 길에서 취한 짐승의 등이 흔들린다 밤안개가 습진처럼 번져 사람의 가슴에 낯선 그리움을 퍼뜨린다 가려움증처럼 피가 날 때까지 제 속을 후벼 파며 사람들은 좁은 골목으로 스며든다 길은 밤마다 두툼해진다 사라지기 좋은 곳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이 오늘도 길의 체위로 잠이 든다

 

- 2014년 <학산문학> 가을호

 

 


 

 

정푸른 시인 / 고래

 

 

세면대의 한 쪽 끝은 바다여서

쓸려간 렌즈 두 짝이 이르는 곳은 아마

눈 먼 고래의 투명한 각막일 것이다

놀랄 거다 그는

지느러미를 더듬어 읽었던 세상과의 돌연한 만남에

희미하던 것들이

자꾸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는 것에

선명하다는 것은 돌아설 수 없다는 거다

 

그가 여백 많은 눈으로 보았던 바다 속을 나도

팔다리를 지느러미 삼아 더듬거린다

신호등에 맞춰 부유물로 떠가는 사람들 사이를 흘러간다

눈코입이 망가진 간판들은 해초처럼 흔들릴 뿐, 말을 걸지 않는다

희미한 것들은 아는 체 하지 않는다

흘러가도 돌려 세울 수 없다는 것

 

나는 눈 먼 고래가 되어 더듬더듬 너를 흘려보내고 있는 거다

 

 


 

 

정푸른 시인 / 몸을 울리며

 

 

늦은 밤 지하도를 내려가는 아련한 불빛 한점

갑사 두른 몸에 향내 가득 흘리며

갓 방생한 생명처럼 두리번거린다

둘러맨 보자기에는 오래된 허기가 전생처럼 끈질기고

미처 단장 못한 발꿈치는 너덜거리는 그녀의 회고록

끈 떨어진 슬리퍼 위에서 수행중이다

어느 전생에 스친 인연이라도 마중하려는 듯

얽힌 머리칼을 부풀리며 그녀는 기어이 곱다

한 끼 밥을 위해 보시하는 오늘밤

뒷꿈치부터 무너져 내리는 몸을 울리며

탁 탁 탁 탁

어둠은 찬물 한 사발처럼 속속들이 깊다

 

 


 

 

정푸른 시인 / 비의 캡슐

 

 

 흩어지기 쉬운 몸을 가진 나는 과립이다

 

느끼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구름의 유전자다 입을 다문 캡슐 속에 아직 가보지 못한 바다와 산과 도시의 기억이 가득하다 시간의 발자국으로 만든 작은 알갱이들, 지도에도 닿지 않은 길이 과립의 바깥을 코팅하고 있다 나는 당신의 따뜻한 입 속에서 사라지기 전 순례의 발을 내딛는다 쿡쿡, 비스켓처럼 부서지는 방문을 열면 파도가 들이치는 세상

 

 물기를 좋아하는 나, 물기를 무서워하는 나, 물기로 뭉쳐진 나,

 

 손을 내밀면 비구름의 늑골이 아직 따뜻하다

 파도는 동그랗게 말아올리지 못하는 무거움에 대한 직유

 차가운 잠언을 증류한 혼잣말이 혀끝에 있다

 문 밖을 떠도는 영혼은 언제나 쓰다

 코팅된 내 몸으로 파고드는 오래된 중얼거림,

 조금씩 열리는 캡슐 속에서 나를 산란한다

 더 작고 작은 과립으로, 둥근 것이 사라지는 순간에

 내 몸은 물에 불은 비스켓처럼

 형체를 알 수 없는 원시原始

 내가 낳은 나를 진흙처럼 이개며 시간이 기름띠처럼

 흘러간다

 

<현대시학>2012년 7월호

 

 


 

 

정푸른 시인 / 떠도는 문장

 

 

고속도로는 질문을 유지하기 좋은 곳이다

 

세상의 고막을 향해 길을 떠나는 미아들

이 길은 세상의 긴 성대다

달리는 동안 나는 자음이고 모음이며

이지러진 말들의 비루한 모성이다

 

나는 속도와 내통한 여자

온몸이 성기인 속도를 끌어안고

산란하지 못한 질문들을 풀어낸다

하혈의 문장 속에 갇힌 토막 난 속내가

가로수에 걸려 미친 듯이 펄럭인다

스피커는 신생아처럼 찢어질 듯 울어대고

룸미러 속에서 먼 배경으로 멀어지는 허기진 질문들

구겨진 질문들이 세상 모든 구석을 떠돈다

나는 상행선과 하행선 사이 키가 자라는

분리대를 끼고 끝없이 달려간다

 

바람만이 행방을 아는 흩어진 행려의 날들

 

터널 속에서 어둠을 삼킨다

가시로 된 기도를 중얼거리며

피 냄새가 밴 페달을 밟는다

이 모든 것이 한 몸인 문장에 흰 꽃핀을 달고

창을 내린다

 

- 2014년 <시사사> 3~4월호

 

 


 

 

정푸른 시인 / 사과

 

 

속살을 아는 이여

이가 닿은 곳을 시간이라고 하자

갈변하는 인연의 색깔에 이유를 달지 말자

거기는 눈물이 닿지 않는 곳

아무도 돌아가지 못할 그믐이다

베어 문 자리에서 돋아난 기억은

물병자리 여인의 시큼한 암내 같은 것

눈물이 마른 자리에서 기어 나오는,

저녁으로 건너가는

사람아

정체를 들키지 말고 사라지자

아직 덜 익은 것의 의미를 찾아

가지 그늘을 흔들지 말자 너무 익은 것들의 악취가

우리들의 생이다

들추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어둑한 백내장으로

다가오는 구름으로 덮어두자

 

상처는 밖으로 자라나온 속살일 뿐, 오래 전부터 우리들의 소유다

 

 


 

 

정푸른 시인 / 향비파 표주박

 

 

그대의 소릴 담고 싶은 소리의 빈 방 같다

깊이 파인 아무도 발 들여 놓은적 없는 유적지

메마른 입술이다

 

이름 알수 없는 신라 장정의 근육들

박물관 진열장에 신화 처럼 일어섰다 가라앉는 음이 되어

울림통에 잠들어 있다

 

그대의 힘줄에 오래된 먼지들이 가늘게 떨린다

옷고름이 하나 둘 풀리는 듯하다

볼록하게 부푼 몸위로 짧지 않은 대나무 술대*가

비단 그림자에 맞춰 연신 내려치고, 올려 뜯고

색다른 음계 헤쳐 들어 간다 관능이다

 

그대의 연주에 각기 다른 음색으로 올라온 낮은 신음들

오무라졌다 펼쳐지는 잘게 그어진 현들이 일순간 떨리면서

소리의 향연들 진열대에 울린다

 

나는 한 껏 젖어있다

빈 방에 색다른 음색이 환청으로 와닿아 내 입술,

돋은 입술은,

 

*향비파를 연주할 때 줄을 퉁기는 막대

 

 


 

정푸른 시인

1970년 경남 진주 출생. 2008년 계간 《미네르바》을 통해 등단. <남가람문학회> 회원. <현대시학회> <시사사회> 회원. 시전문 계간지 <시와 환상>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