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 시인 / 소녀상 앞에서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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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 시인 / 소녀상 앞에서
오동나무 이파리가 가을비에 울고 있네 억울한 발걸음도 허적허적 울고 있네 또 한 번 위태로운 꿈 함께 꾸며 울고 있네
방문을 잠가 걸던 소녀처럼 울고 있네 양철지붕 두드리던 가난으로 울고 있네 옥양목 가녀린 어깨 소복소복 울고 있네
보상이니 배상이니 집어쳐라 울고 있네 절망으로 울고 있네 설움으로 울고 있네 짓밟힌 피눈물들이 그렁그렁 울고 있네
-시조집 <나, 조국>에서
김진수 시인 / 바람벽
그만둘까 포기할까 아무 일 없었듯이 비닐봉다리 같은 약속 질질 끌고 와서 남몰래 눈물 쏟거나 발길질을 하고 간다
고개를 숙인 채로 한참을 서 있다가 힘없이 무너지는 또 한사람 벽이여 제발 좀 일어나보세요 저도 여기 있잖아요.
견딜 수 없었다는 변명 따윈 하기 싫어 그늘진 등짝으로 두 눈동자 가렸더니 차가운 바람벽에도 등 기대는 사람들
김진수 시인 / 꽃은 또 피겠지만
첫 번째 노심초사는 푼돈 몇 장이었다 가슴이 터질 듯한 어둠을 짓누르고 냉랭한 꽃샘바람에도 속절없이 흔들렸다
풍등처럼 부풀리던 청매화도 오밤중 숨소리도 조마조마 마른침만 삼킨다 함부로 내 뻗은 가지에 목 매달은 공작새
개나리 두견화 사꾸라꽃 만세 같은 새빨간 공약들을 갈피갈피 끼워놓아 다시금 펼칠 때마다 까막눈으로 읽힌다
김진수 시인 / 좌광우도
외길로 뚫린 마래터널을 지나 만성리까지 무사히 가려면 몇 번쯤은 오른쪽으로 비켜 설 줄 아는 게 요령이다
굴밖 비렁에는 요령 없이 터널을 빠져 나가다 무지막지한 손가락 총에 맥없이 수장된 수많은 통곡소리가 아직 파도치고 태풍이 쓸고 간 만성리 횟집은 밤이 돼도 컴컴하다
활어통 바닥에 납작 엎드렸던 광어 도다리들이 순환모터가 멈춰 선 수조를 뛰쳐나와 땅바닥에 온통 널브러진 횟집 앞에서 구경꾼의 논란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왼쪽으로 눈이 쏠려 있으면 광어고 오른쪽으로 쏠려 있으면 도다리라며 광어와 도다리의 구분법을 잘 안다는 자 오늘도그자의 높은 목청 아래 함부로 분별해선 안 될 슬픈 과거사가 또한 번 들춰지고 뒤집어진다
좌우지간은 손만 내밀면 가장 가까운 거리다 팽팽히 맞서서 보이는 것이 좌광 우도 라면 서로의 어깨를 한 번 다정히 감싸보자 그러면 금새 우광 좌도로 바뀌고 만다
그렇다, 어느 바다에서 어떻게 살았던지 광어는 본래부터 광어였고 도다리는 그냥 도다리였을 뿐이다.
김진수 시인 / 얼릉 오이다
그대 그리운 날은 여수로 오이다 세상의 모든 봄은 여기서 시작되고 세상의 모든 맹세도 여기서는 굳어지 나니
사랑을 잃고 시를 잃고 꿈과 희망마저 까마득한 날이 가든 얼릉 오이다! 여수로 오이다! 세상의 모든 설움 여기 와서 풀고 가이다
오동도 동백숲 쫑포해변 밤바다 발걸음 걸음마다 가슴 가득 꽃 붉을 때 돔바리 서대회 새콤달콤한 인정으로 막걸리 한 사발 쭈욱들이키면 다시금 아름답고 물 맑은 파도소리 그래서 여수여라 사랑이고 시랑께라
김진수 시인 / 헛 장
어머니 피가 붉어 내 피도 붉다
해마다 낫을 가는 어머니의 길을 따라 뿌리 깊은 칡넝쿨 발목을 휘감는 망금산 해거름 참 억새 숲을 헤치면 흐려진 비문 하나 납작한 봉분을 지키고 섰다 반란이라고 그 놈이, 다시 그 놈이 마을마다 개몽댕이질을 하고 다녔다고, 피투성이가된 사람들 보고 이번엔 저 봐라! 빨갱이가 틀림 없다고, 멀쩡한 사람들을 또 엮어 간, 그 놈이 해방 후 슬그머니 고향땅을 밟았다가 귀싸대기를 얻어맞고 찢겨났던 황국 순사 미야모토였다고, 해방구도 꿈꾸었던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고, 정한수 까맣게 타들어 간 밤도 어김없이 하침 해로 다시밝아 오는데 애기 섬 형제섬, 흰여가 붉여가 됐다고 발목 묶은 철사 줄에 돌멍까지 채워서 여수바다 어디쯤에다 수장을했다드라고, 뜬소문만 수군수군 떠밀려 오드라고, 동짓달 열하루 생월 생신날 옥양목 두필에 쌀 한 동이 다 쓰고 큰 동네명두무당이 겨우 건져 올린 부석처럼 떠다 니던 육척장신 건장한 넋을 당신쓰던 밥그릇에 고봉으로 담아서 가장골 옹사리밭에 고이 모셔 드렸다고, 아비 잃고 덧씌워진 빨갱이 호적부엔 억새꽃만 이듬이듬 피고 지드라고, 연좌넝쿨 칭칭한 피울음 한마 디나서지 마라, 나서지 마라.!' 어머니 등 굽은 낫질에 올해도 가시넝쿨 눈물다발로 걷힌다.
김진수 시인 / 시시한 시
도대체 어디 가서 시를 만날 것인가 어떻게 쓰는 것이 시가 된단 말인가에 “고것 참, 배웠단 놈이 그런 것도 모르냐?”
언문(言文)을 배우신다 기어이 우기시는 한글학교 갓 입학한 일흔여덟 울 어머니 “시옷에 짝대기 하나 빤듯이 끄서봐라!”
시옷에 짝대기를 빤듯이 끄서보니 사람(ㅅ)이 올곧은(ㅣ) 생각하날 부린다? 아뿔사, 이것이었네 네 모습이 시로구나
- 2011년 <유심>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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