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영 시인 / 정신병동 이야기 4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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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영 시인 / 정신병동 이야기 4 -담배
밑동이 아직은 싱싱한 계집애가 다리를 흔들며 담배를 피운다 상당히 방정맞게 대뜸 아줌마 미쳐서 왔지? 싸가지 없이 반말이다 여기 온 지 몇 달째야? 되먹지 못하게 또 반말이다 병원에 들어온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겁부터 준다 아가씬 여기 왜 들어 왔는데요? 나 아직 학생이거든? 씨발 약물중독 땜에 왔는데 좆같이 담배도 맘대로 못 피게 하냐 하루에 반갑이 뭐냐 반갑이 나 며칠 있으면 나가 아줌마도 여기 오래 있지 마 생사람 병신 만든다니까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욕을 속으로 삼키고 점잖은 아줌마가 되었다
-시집 『봄에 덧 나다』에서
조혜영 시인 / 배낭
3일간의 파업을 끝내고 돌아온 남편의 파업배낭을 푼다 침낭에 붙어있는 누런 잔디와 마른 잎가지들 사이로 숨 가빴던 새벽의 찬 공기와 헬기에서 뿌린 철도청장의 삐라가 들어있다 가쁜 숨 몰아쉬며 허공을 내젓는 남편의 손짓은 꿈속에서도 그놈의 구호를 외치나 보다 시민의 발을 묶어놓고 밥그릇싸움 한다며 배부른 놈들이 더한다고 실업자는 열 받아 못살겠다는 어떤 시민의 묶인 발을 생각하며 나는 파업배낭을 푼다 직권조인, 파업철회, 현장복귀명령 울분을 뒤로하고 철수하던 대열에 따라 등에서 흔들리던 파업배낭 대한노총 때 만들어져 52년 어용 철도노조 사상 첫 총파업을 수행했다는 승리감 하나로 현장에 복귀하던 날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었을 파업배낭 그 짐을 하나하나 풀며 위원장이 흘리던 눈물을 잠시 떠올린다 여차하면 다시 배낭을 꾸려야 한다며 철도는 이제 시작이라던 남편의 말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아무래도 민영화 철회를 위해선 파업배낭을 너무 일찍 풀었구나 내가 이제 시작이라는데 시민의 발을 다시 묶어서 그 묶인 발들의 쇠밧줄을 풀어줄 그날을 다시 기다리는 지금은 야윈 파업배낭
조혜영 시인 / 변형근로, 변형부부
새벽 4시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나는 10년이 넘도록 밥상을 한 번도 차려주지 않았어요 정신없이 출근했다 퇴근해 집에 오면 야근하고 새벽 퇴근한 남편 이불도 개고 청소도 하고 밀린 빨래도 하고 더러는 저녁밥상까지 차려 모처럼 온 식구가 밥을 먹는 날 사랑 받으려면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며 미안하게 설거지까지 하는 남편에게 나는 맞벌이하는 여자들의 시시콜콜한 불평을 정신없이 늘어놓다가 이불 속에서 별을 따는 우리는 정신없는 맞벌이 철도의 변형근로가 우리한테는 안성맞춤이야 식당 일이 노가다인데 밥하는 일 정말 지겹겠다 노조 일에 며칠 얼굴보기 힘든데 요리조리 쳐다보고 자꾸 쓰다듬고 파업하면 집안일에 신경 못 쓸 거라며 문풍지도 붙이고 보일러도 점검하고 그래서 나는 국수도 말고 요리를 해서 우리는 늦은 밤까지 술 한 잔 했는데 철도가 파업해 승리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하려면 확실하게 하라고 큰소리치기는 쳤는데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새해에는 시댁에 맡긴 작은 아들도 데려다 키워야 하고 시아버지 칠순인데 금강산 관광 보내드린다고 했었지 부모님 약값은 해마다 하나씩 더 늘고 전세계약도 끝나고 큰 녀석 생각하면 이제 적금하나 들어야 할텐데 노조 일 반대하지 않아 고맙다며 해고 돼도 이해할 수 있겠냐는 남편 말에 까짓 것 내가 벌어먹고 살면 되지 그러긴 했는데 새벽 출근 때문에 일찍 잠든 남편 곁을 나와 술 몇 잔 더 마셔도 취하지 않고
조혜영 시인 / 안면
재래시장에 가면 물건을 사는 것보다 사람 하나 만나는 게 더 보람되다 오늘은 완두콩 푸성귀 모아놓고 컵라면 쭉 빨아 넘기던 할머니를 덤까지 얹어 이천 원에 샀지 맘까지 몰래 훔쳐왔지
-시집 『봄에 덧나다』, 푸른사상, 2012
조혜영 시인 / 시가 안 써지는 날
무슨 일이든 한 10년 하면 기능공이라는데, 스무살 적 봉제공장 시다로 일할 때 A급 미싱사 언니들이 그랬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느다란 쇠에 구멍을 몇십 개씩 뚫었다는 금형공 남편이 그랬다
근 10년 급식실에서 조리를 하는 나는 칼날이 안 보이도록 칼질을 하고 저물보다 정확한 눈대중과 수십 가지 요리를 거침없이 해내고 수백 명의 아이들 이름을 외무고 저마다의 식성도 정확히 기억한다 내 기술도 이쯤이면 기능공 못지않다
허나 20여 년 넘게 시를 써온 기능은 좀처럼 늘지 않는다 푸대접했다 노동시를 쓰겠다며 겁 없어 덤빈 용기만 믿고 문학이나 예술이 노동인 사람들에겐 참으로 인색한 잣대를 들이밀었다
무슨 일이든 10년의 길을 걸으면 기능공이다 문학도 노동이라 그도 10년 넘게 하면 그 기능 또한 인정해야 됨을 남들이 꺼리는 노동문학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노동문학 기능공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조혜영 시인 / 천둥오리
자폐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천둥오리 수천의 무리 속을 따라가지 못하고 딴길로 샌다 자꾸만 자꾸만 엇박자로 난다 얼마나 황홀할까? 그놈의 날갯짓에 눈시울이 다 뜨거워진다 그러나 그놈은 아직 천둥오리다
-시집 『봄에 덧나다』에서
조혜영 시인 / 키질
늦가을 콩밭에서 어머니 거둬들인 콩나락 키질을 하는데 킬킬킬 흰콩이 볶아대듯 달아난다 성한 놈은 성한 놈끼리 깨진 놈은 깨진 놈끼리 못난놈은 못난 놈끼리 혼돈 속에서 한데 뭉치다 알맹이는 키 안에서 웅크리고 무지랭이 앞 다투어 경계를 넘는다
-시집 『검지에 핀 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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