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임백 시인 / 바람이 전하는 말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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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임백 시인 / 바람이 전하는 말
들판 가로질러 온 바람이 떡갈나무 마구 흔들어 깨운다 마지막 끈 놓치기 싫어 허우적거리는 잎사귀에게 이제는 손 놓아야지 허공 맴돌며 몸부림치다가 먼저 와 있던 낙엽 더미 속에 얼굴 파묻는다 푸석한 몸뚱어리 할 일 다 했으니 이제, 서러워하지 않으리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길
바스락거리는 소리 즐기며 낙엽길 걸어가는 젊은 남녀 한 쌍 물끄러미 바라보는 노파 언젠가 다가올 그들의 모습이란 걸 바람이 넌지시 알려주고 간다
-계간 <詩하늘 108> (2022년 겨울호)
김임백 시인 / 강가에서
기지개 켜고 하품 늘어지게 하는 강물 비몽사몽 꿈속 헤매다 깨어보니 아지랑이 춤추고 봄 햇살 긴 입맞춤으로 반겨준다 폐인처럼 멍하게 퍼질러 앉은 머리 위로 군불 지피고 있는 태양 굽이굽이 휘돌아 나온 날들 잃어버린 길 찾아 나서야 하는데 엄두 내지 못한 채 강가에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가야 할 길 가로막던 동장군 슬슬 뒤꽁무니 빼고 담방담방 뛰노는 물고기들 재롱부리고 있다
아, 나는 지금 사해(死海)로 갈 것인지 갈릴레아 호수로 갈 것인지
김임백 시인 / 풍선과 스트레스
몰아내고 싶은 스트레스의 부피가 커 입김을 불 때마다 부풀어 오르던 풍선 놓아 버리니 나뭇가지에 걸려 깃발처럼 나부낀다 금세라도 터질 듯 가득 차인 스트레스 저만치서 펄럭이다가 아득히 사라지는데 아슬아슬한 언쟁 후 갈기갈기 찢어지는 마음 텅 비어가는 어느 때쯤 분노는 사그라지고 도심의 거리에서 떠돌아다니는 풍선 하나만큼의 빈자리가 견고한 뼛속으로 느껴진다 터뜨려 가벼워진 내 좁은 마음의 모퉁이에 오랜 적막 깨고 들려오는 웃음소리 물감보다 더 진한 채색의 풍선 되어 한 줄기 바람에 날아간다.
김임백 시인 / 부화를 꿈구며
새벽이슬에 젖은 나팔꽃 햇살로 망울 털고 있을 때 막 알에서 깨어난 나비 창공으로 떼 지어 날아오른다 저 나비 떼 좀 봐 나도 나비처럼 부화하는 거야 은하수 넘실대는 밤이 되어서야 고요로 언어를 쏟아내듯 나비 되려는 몸짓! 어둠 속에서 막막한 고뇌 가슴으로 부딪치고 머리로 들이밀어 볼까 돌풍 불어오는 황야에 서서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나오듯 한 꺼풀 벗긴다는 것은 통증을 자초하는 것 언젠가는 샛별 되어 강가에서 횃불 흔들겠지
김임백 시인 / 나도 봄이면 안 될까
봄은 싱그러운 천국
녹색의 잎사귀 그러하고
이파리에 숨어 사는
바람소리 그러하고
물소리 닮아 맑은
당신의 목소리 그러하다
풀잎 사이로 햇빛 흘러내리고
아카시아꽃으로 은은하게
세상 덮는 오월
걸어나가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김임백 시인 / 상생(相生)
길바닥에 내팽개쳐져 속울음 삼키던 폐타이어 하나 달리는 자동차 바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도 한때는 저렇게 달렸지 겁 없이 담벼락이나 시궁창을 들이박고 전치 3주의 진단 받아도 오직 질주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날들 일생을 아스팔트에 바치고 평생 속도에 지친 몸 때로는 마음 속 묻어 둔 내일의 희망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었다 영혼의 궁핍 속에서 가슴 한쪽만 가지고 살아온 날들 폐타이어 틈새로 고개 내민 민들레꽃 한 송이 이제 나랑 놀자 하며 환한 웃음 머금고 손 내민다 비가 오면 두둥실 나룻배 띄우고 바람 가득 찼던 허황된 꿈마저 비워낸 채 오직 내 한쪽 팔 늘어지고 내 등뼈 휘어져 쭈그리고 앉아 오로지 미쳐버린 불사조처럼 아직 남은 온기로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노란 민들레꽃 한 송이 키우고 있다
- 시집 『부화를 꿈꾸며』(해암, 2019)
김임백 시인 / 겨울 담쟁이
무엇을 얻으려고 안간힘 썼던가 겁 없이 훌쩍 담장 뛰어넘으려 했지만 더는 디딜 곳 없는 허공 아득하여라 여린 발가락 움직여 담벼락 오를 때 부풀었던 꿈들 보란 듯 꼭대기에서 짙푸른 빛으로 담장 너머 먼 세상 거머쥐려 했건만 축대 벽에 붙어 수맥은 마르고 팔다리 떨려도 힘차게 오른다 바람이 살갗 스쳐 지나가 핏기 마른 가슴 바싹 움츠려든다 이슬처럼 머물다 사라질 몸 분별없이 천하를 내 것인 양 하늘로 올라갈 것처럼 교만했던 지난 날 한 마음 가슴으로 삼키고 담벼락을 움켜쥐고 기댄 채 땅속 깊은 곳 물소리에 귀 기울인다
-월간『우리詩』 2020년 02월 380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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