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선 시인 / 둥구나무 아버지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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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선 시인 / 둥구나무 아버지
아버지 어젯밤 당신 꿈을 꾸었습니다 언제나처럼 한 쪽 어깨가 약간 올라간 지게를 많이 져서 구부정한 등을 기울이고 물끄러미, 할 말 있는 듯 없는 듯 제 얼굴을 건너다보는 그 눈길 앞에서 저는 그만 목이 메었습니다
옹이 박힌 그 손에 곡괭이를 잡으시고 파고 또 파도 깊이 모를 허방 같은 삶의 밭이랑을 허비시며 우리 오남매 넉넉히 품어 안아 키워주신 아버지
이제 홀로 고향집에 남아서 날개짓 배워 다 날아가 버린 빈 둥지 지키시며 ‘그래, 바쁘지? 내 다아 안다.' 보고 싶어도 안으로만 삼키고 먼산바라기 되시는 당신은 세상살이 상처 입은 마음 기대어 울고 싶은 고향집 울타리 땡볕도 천둥도 막아 주는 마을 앞 둥구나무
아버지 이제 저희가 그 둥구나무 될게요 시원한 그늘에 돗자리 펴고 장기 한 판 두시면서 너털웃음 크게 한 번 웃어보세요 주름살 골골마다 그리움 배어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
*KBS 제1 TV ‘아침마당’에 낭송된 시 (1999. 5. 3.)
-시집 《불로 끄다, 물에 타오르다》에서
이혜선 시인 / 새우젓사랑
소금물 속에 녹아 살과 뼈 다 내주고 까만 눈만 뜨고 기다리는 새우 새우몸을 받아 안아 제 살과 뼈 함께 녹여 흔적 없이 사라지는 소금 둘이 무르녹아 사라진 뒤에 태어나는 둥근 항아리 하나
이혜선 시인 / 동그라미가 되고 싶다 꽃과 사랑을 나누는 참 좋은 봄비가 되고 싶다 말 없는 지렁이와 굼벵이의 눈짓을 알아듣는 길이 되고 싶다 가랑잎 바스라진 몸 몸으로 덮어주는 첫서리가 되고 싶다 강물심장에 내려 하나 되어 퍼져나가는 눈송이가 되고 싶다 동그라미가 되고 싶다
이혜선 시인 / 수유꽃그늘 아래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자락 다소곳 엎드려 있는 산수유마을 흐르는 물소리 따라 수유에 피었다 지는 연노랑 꽃그늘 아래 너와 나 눈 맞추었을 때 하늘에 별 땅에는 별꽃 어울려 환히 웃고 몇 겁劫 후의 햇빛이 내려와 머리칼 쓰다듬고.
이혜선 시인 / 운문호일雲門好日, 풍경소리
살을 벗은 물고기가
내장도 다 벗은 물고기가
밤마다 가시멍석 위 맨발로 노래한다
퍼렇게 멍든 이끼가슴 남몰래 잉걸불로 꽃피운다
재만 남은 맨발에서 새잎이 돋아난다
하늘강물 걷는 알몸 그 사내, 잉걸불 노랫소리 탄다
이혜선 시인 / 지리산 나리꽃
지리산지킴이 할머니
“산을 다 지고 다녀서 내 허리가 이리 굽은 게비여”
하늘 땅 사이 점박이꽃 한 송이
쑥국새 울음 속 들여다보며 웃는다
이혜선 시인 / 수로부인, 독거미 성운星雲*
무수한 별들 속에 도사린 거미의 독침
한 천년 깊이 잠든
내 세포를 깨우네
너의 블랙홀에 빠져버린 붉은 심장,
80만개 원시별로 나를 유혹하는 은하계 진달래 분홍피톨
바닷속 용왕의 사랑피톨
내 피 속 하이드씨가 사랑하는 수로부인, 독거미성운
*독거미 성운: 지구로부터 16만 5천 광년 떨어져 있는 타란툴라성운, 거미같이 생겨서 독거미 성운이라 불리며 80만개 원시별이 담겨 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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