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재리 시인 / 부메랑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0. 08:00
정재리 시인 / 부메랑

정재리 시인 / 부메랑

-카주라호*행

 

 

열차가 휘어질 때

마음이 몸을 슬몃 돌아나가는

 

강렬하고 깊은 눈망울까지, 라고 건네신다면

아그라를 떠나는 밤차 타고

 

나는 더, 더 남쪽으로 흘러갈 거예요

 

사라진 우리의 흡연실 밖으로

열이나 백이나 하나인 듯 스치며 가벼움은

가볍게 흩어지면서

 

습기 찬 차창에 써 본 글씨는

대낮에 돌아옵니다

 

뒤로 휘어진 뿔로 자신의 목덜미를 겨누며

점차 난폭해지는 염소

 

싸워보기 전에는 알 수 없기에

 

오늘 나의 전언은 다만

뿔의 단면

 

단칼일까 이것은

사랑해! 총이다 이것은

 

*인도 중부에 위치한 마을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카마수트라 사원이 있다

 

 


 

 

정재리 시인 / 멀미

 

 

 친구는 모르는 옆 사람과 와인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이런 자리에서 술 안

먹는 사람은 재수 없다고

 테이블 위 조용한 접시에는 붉은 하몽 몇 점이 남아있었다 나는 스페인광장이 멀리 보이는 열린 창 쪽으로 고개 돌려 우리 식 자카란다* 발음보다 하강하는 하카란다 격음이 혀끝에 쏠렸다 갸름한 보라색 꽃잎들이 온통 파랑을 머금고 있었다

 

*자카란다- 아프리카 벚꽃, 스페인 가로수로 많이 볼 수 있다

 

서정시학 2023 여름호 발표

 

 


 

 

정재리 시인 / 수면

 

 

블루에는 블랙이 가라앉아 있다

눈 감고 있다

참고 있다

피콕블루 마조럴블루 한블루 미드나잇블루 가로로 그으면 먼 물결

잠들기 전에

 

수심에 대해 말하려 하지만

말줄임표와 느낌표 사이의 어조를 결정하지 못해

깊이 잠긴다

 

견디고 견디다 마침내 견고해지는

바위가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 언덕은 그림자로 뛰어내리고

죽고 못살던 애인은 옛 애인이 되어 버리고

 

돌아누울수록 불어나는 이야기들

 

배를 뒤집을 꿈이라도 꾸겠네

 

파랑이 인다 파랑은

물고기가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물결 파 물결 랑

어쩐지 벨벳 같아 손바닥으로 쓸어 보면

 

야옹, 새벽잠을 깨우는 환청

 

항구의 빛나는 푸른 눈 그 검은 고양이 안아 본 적도 없는데

환상통을 앓는 이유

 

깊은 바닷물로 지붕을 들어 올리는 시간

 

알고 보면 가벼운

프러시안블루다

 

 


 

 

정재리 시인 / 직립의 시간

 

 

새로산 버킷햇은 검정색 자카르 원단

자카르카르자꾸 발음해 보면

달려드는 자칼을 입에 물고서

 

머리 다리 꼬리와

머리 다리 꼬리를

 

바늘귀에 끼웠을 것이다

한 걸음씩

어떤 가로에 어떤 세로가

없던 머리 위에 없던 이야기가

 

집요해 아픈 줄도 모르는 무늬가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저것 봐 날렵한 솜씨에 대한 칭찬이 무성해질수록 두 귀는 뾰족해지고 커다래져서 남자에게 충실하지 않은 여자가 환생하면 자칼이 된다는 인도 속담까지 다 들렸을 것이다

 

두 다리와 네 다리 사이를 오가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

 

거울 앞에 서서

G 모양 로고를 옆으로 돌려 쓰면

돌이킬 수 없는 안과 밖

 

머리 안에 숨기고 있어 내보일 마음이 적다

모자는 소중하고 조금 작다

 

모자 파는 아저씨처럼 자가드자가드

올이 풀리듯 무심하게 말해 보면 한결 친숙해지는

도톰하고 매끈한 직조

 

고개를 꼿꼿이 들고 나는

 

두 손으로 쓰고 한 손으로 벗었지

 

-시집 <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

 

 


 

 

정재리 시인 / 악어

 

 

쉿!은 가로입니까 세로입니까

손가락이 입술을 떠날 때

하모니카가 문득 함구할 때

옆에 옆에 너 말고 너 옆에 그 옆에

키스처럼 나는 속았지.

 

자장가 연주 때문에 잠이 달아나던 모래 위의 낮잠은

사막여우처럼 예민해져서

 

잃어버린 아기 코끼리 투마가 무리를 찾아 돌아오고 있어요

반 토막 난 코를 조금 흔들며

목마른 강가 사라진 이틀과 코에 대하여 모르는 냄새에 대하여 혼자에 대하여 당신은

질문하지 않는 사람

꽉 다문 입 속에 무엇이 있다.

 

투마의 말랑한 코와 볖 뢀 뱐 샇 줃 괆 횽…… 이런 아이들이

어둠을 다 빨아 먹고

안에서 걸어 잠근 감옥

 

밖에, 멸종한 하모니카가

골다공증의 뼈처럼 놓여있다.

 

 


 

 

정재리 시인 / 불현 듯 빛나는 테두리

 

 

1월의 탄생석은 가넷

지구에 툭 떨어진 작은 알갱이에

둘레를 선물하자 반지가 되었습니다

 

축하해

검붉은 석류알을 낳고 또 낳았으면 좋겠어

 

더운나라에서 따뜻한 손을 몰래 잡으면

빈병 속으로 스르르 들어가는 뱀 한 마리

 

개와 고양이, 원숭이, 소, 비쩍 마른 닭이

사원 밖으로 다 흩어질 때

 

입을 벌리고 입술이 터지는

테두리면서 알맹이인 저 둥근 안경알을 의심하죠

 

휘어진 담장이 그늘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유리포트 눈금까지 물을 채우고

상황버섯에 생강 한쪽을 넣어 가열하면

 

부르르 끓어 넘치고 마는 여기는캄보디아

반짝거린다. 말하고 보면 이미 반짝거리는 사람들이

다시 웃고 있습니다

 

 


 

정재리 시인

1999년 한국문인협회 수원 지부 시 부문 신인상. 2017년 ≪서정시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 2023 제 3회 시산맥 시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