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옥 시인 / 바늘의 기도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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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옥 시인 / 바늘의 기도 나는 비단실 꿰고 노는 바늘입니다 바늘구멍으로 보는 세상은 바늘구멍만 한 세상 뾰족한 것으로 찔러 채워지는 빈자리는 바늘 꽂히는 비단결입니다 나무와 나뭇잎 원앙새와 오리 평생을 슬프게 사는 두루미가 있습니다 오늘 밤도 사슴 한 쌍 눈을 찌르는 모란꽃이 피도록 모란을 찌르는 창포꽃이 피도록 창포를 찌르는 원앙새 청둥오리 바늘 끝을 피해 다녀도 결국 찌르는 쪽가위로 매듭을 끊고 풀칠하여 입을 막아버리면 매듭을 붙잡고 울고 있는 당신 비단결을 찌르고 사는 나는 바늘구멍만큼 열린 세상을 세상 전부로 아는 바늘입니다 강물로 펼쳐진 비단 천을 잘라 내 틀에 끼우고 남을 찔러 만드는 나의 밤낮에 평생을 슬프게 사는 두루미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을 찌르고 사는 바늘입니다
조향옥 시인 / 달빛
텅 빈 길 돌아옵니다 달빛이 나를 불러 세웁니다 뒤 돌아 봅니다 이팝나무 그림자가 흔들립니다 혼잣말에 대답 합니다 아침에 벗어놓은 옷 그대로 있습니다 마시던 물 잔도 그대로 있습니다 꽃병을 들어다 봅니다 목이 잘린 것들입니다 절망은 속이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달빛이 따라와서 꽃을 봅니다 희미한 발자국을 봅니다 발자국이 발자국을 찍고 갑니다 허공으로 찍고 갑니다 그 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조향옥 시인 / 단풍 지는 계절에 서어나무가 되어 그때처럼 벗고 있네요 단정한 목덜미 서 있네요 처음 돋는 것들은 아팠어요 빨간 잎눈으로 터졌어요 온몸 구석구석 건드리지 않아도 터졌어요 숨기고 싶은 것 잎사귀 밑에 감추었어요 청량산 서어나무를 보세요 청춘을 겉옷처럼 벗어들고 단풍 속으로 걸어가네요 이름표 단 젊음이 사열하듯 서 있네요 나는 구름이 되기로 하여요 빗물이 되기로 하여요 다시 구름이 되기로 하여요 굵은 허벅지 건강한 팔다리 나는 비가 되어 한 백년 너의 몸 씻어 주었느니 저기를 보세요 물들어 붉고 노란 것들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을 붙들고 비탈져 울고 있네요 떨 어지고 있네요 그 모자, 그 목덜미, 그 옷, 그 빗물, 그 단풍 이제 나는 서어나무가 되겠어요 통증 붉은 잎눈을 기억하는 나무 건강한 팔다리 기억하는 나무 나는 그런 나무가 되어 한오백년 살아야겠어요 당신은 비가 되어 벗은 내 몸 씻어 주어요 천번 만번 키스해 주어요 나 지금 여기 있어요 -시집 『남강의 시간』 (애지, 2021)
조향옥 시인 / 모자
나는 벗어두는 얼굴이 많다
접고 포개놓는 모자 속에 모르는 내 얼굴이 많다
정동진 파도 눈썹 위로 밀려오던 날 철로 위로 굴러가는 솔잎과 모자 모래 털고 솔잎 떼어내고 모자 속에 손을 넣고 역사 한 바퀴 빙 둘러보고 건네는 내 모자
해안선 따라가는 수평선과 모래와 바람 벤치 앞 출렁이는 바닷물을 두고 철길은 프레임을 벗어나고 있다
나는 얼굴 없는 모자 빈 모자
한 번씩 써보고 벗어두는 모자
나는 쓰지 않는 모자
조향옥 시인 / 야생차
나는 있었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모래를 보는 강가에서 별이 떨어져 모래알이 되었다고 믿는 강가에서 그냥 그대로 있었습니다
찻잔 속에 빠진 찻잎을 입술로 밀어내면 늘 흐느끼는 무엇을 느꼈습니다
아무도 말 걸지 않는 강가에서 달빛 마시고 모래가 그려 놓은 물결을 보며
그냥 있었습니다
조향옥 시인 / 토분
슬레이트 개집 위에 앉아 있었다 토분
한줌의 흙만 있었어도 키 작은 채송화 한 송이는 피울 수 있었는데 달빛을 마셔도 휘청거렸다 환삼덩굴 밑에서 나온 부연 꽃가루들이 꽃 환영처럼 날아다녔다
빗물이 슬레이트를 칠 때마다 토분 외로움을 덧대어 입고 기다렸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된다 달빛을 마시며 밤을 견딘다
아, 하고 입을 벌린 채 곧 따라 나설 것이다
조향옥 시인 / 단춧구멍을 위한 주기도문
삼십 여년 단춧구멍만 치던 미싱입니다 뛰던 노루발 보폭과 바늘 끝에 생겨나던 단춧구멍이 세상 전부입니다 노루발 앞에 단추 하나 주워 키를 재던 눈금과 토하던 기침소리 쓸어 담던 날들이 쪽가위에 잘리고 한 땀 한 땀 기운 날들입니다 축축한 하루 아무렇지 않게 잘라버리던 가위도 북실에 딸려 나오는 질긴 그것들과 섞여 단춧구멍에 모여 살았습니다 그 곳은 조바심이 목에 걸린 바늘 끝이었습니다
오로지 바늘 끝으로 서 있던 미싱은 단춧구멍 없는 옷을 보지 못했습니다 노루발이 앞으로 뛰다가 뒤로 뛰다가 만들어진 단춧구멍 단추를 꼬시어 입을 꾹 다문 채 떠났습니다 간혹 단춧구멍 실이 풀리면 드러난 상처를 다시 기우려고 기도문을 외우던 미싱입니다 잘 우는 옷감에게 용기를 주시옵고 단추를 채우면 반듯한 옷이 되게 하시옵고 슬픔을 농담으로 바꿀 줄 아는 노루발이 되게 하시옵고 아멘
미싱은 단추 달린 옷을 입을 수 없었습니다 단춧구멍만 치는 미싱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춧구멍을 칩니다 덮개를 만듭니다 노루발도 북실도 가위도 서랍에 넣습니다 이미 어두워져버린 국제시장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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