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옥 시인 / 당신의 산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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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옥 시인 / 당신의 산
어느 날 나는 안개처럼 누우며 말했다
누가 이 길을 만들었을까, 라는 것은 묻지 말아요 어째서 이 길에 당신 같은 꽃은 피어있는 거냐고 묻지도 말아요 푸른 잎사귀도 저들끼리 살을 부대끼며 풀어지고 흔들리잖아요 길목을 돌아 사라지는 말 때문에 너무 깊은 숲으로 쫓아가지 말아요 그러나 요술에 걸린 듯 멈추어 있지도 말아요 너무 멀리 있다거나 너무 가까이 있어 길을 잃는 사람들을 나는 종종 목격했어요 봐요 경사진 언덕을 넘어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눈물 속으로 숨는 하늘을
사소한 말이 담을 넘어 다시 되돌아오는 것에 당황하지 말아요 야단스러운 것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에요 샛강으로 인한 이 길에 시야를 흐려놓는 안개는 얼마든지 있어요 그때 안개 속에다 모든 것을 지우고 쉬어가듯 당신 가까이에 있을 나를 봐요 나는 이제 어디에서나 나타나고 사라지고 끄떡하지 않는 당신의 산이에요
유금옥 시인 / 마스크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하얀 구름을 입에 물고 다니기 시작했다
구름 조각에 끈을 달아서 귀고리처럼 귀에 걸거나 목걸이처럼 목에 두르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래의 구름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했다
구름도 아닌데, 구름처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공중을 떠다니거나 기차를 타고 몰려다니며 데이트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산다
본시, 구름은 갓 태어난 어린 빗방울들에게 민들레, 제비꽃, 강아지풀 같은 이름을 지어주며 살았는데 해와 달과 별과 이웃하며 살았는데
아파트들이 떼로 몰려와 들판을 쳐부쉈다 그날부터 열을 내고 기침을 하고 가슴이 딱딱해지는 병이 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돌멩이처럼 딱딱해졌고, 사람들은 뿔뿔이 거리를 굴러다녔고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워졌지만
법에 능통한 돌멩이들은 모여 있어도 서로 섞이지 않는 법을 만들었고
상술이 뛰어난 돌멩이들은 흰 구름을 조각내어 팔기 시작했다
이제, 구름은 약국에서 판다
구름도 아닌데 구름처럼 사람들이 뭉게뭉게 약국으로 모여드는 오전 9시
새도 아닌데 새처럼 드론 카메라 한 대가 하늘 속으로 파고든다
유금옥 시인 / 살구꽃 향기 (2011년도 조선일보 동시 당선작)
민지는 신체장애 3급입니다 순희는 지적장애 2급입니다 우리반 다른 친구들은 모두 정상입니다
민지가 바지에 똥을 싸면 순희가 얼른, 화장실로 데려가 똥 덩어리를 치우고 닦아 줍니다
다른 친구들이 코를 막고 교실에서 킥킥 웃을 때
순희는 민지를 업고 가늘고 긴- 복도를 걸어올 때
유리창 밖 살구나무가 얼른, 꽃향기를 뿌려줍니다
살구나무도 신체장애 1급입니다 따뜻한 햇볕과 바람이 달려와 꽃피우는 걸 도와주었습니다
유금옥 시인 / 연꽃
누가 흙탕물 위에 영혼을 놓고 갔다
놓는다는 것은 누군가 다른 이에게 건네준다는 것
오래전 나도 누군가에게 내 영혼을 건네주었던 적이 있다
둘 데 없어 당신은 차마 버렸을 테지만
나는 영혼도 없는 사람이 되어 연못가나 거니는 사람이 되어
경포 습지 오솔길처럼 홀로 저물어 가는데
저, 저문 하늘에 누가 환한 달 하나 놓고 가네
유금옥 시인 / 경포 습지에 스미다
비 내려 적막하니 나 홀로 걸어가네 연분홍 연꽃 사이 물오리 노니는 듯 우산은 부질없어요 호숫가 느린 걸음
나 오늘 비 맞으리 우산 접고 비 맞으리 연분홍 연꽃 사이 물오리나 되었으니 구두는 필요 없어요 호숫가 느린 걸음
유금옥 시인 / 찔레꽃
산골 마을도서관 회원들은 하얀틀니를 끼고 오십니다
오늘은 한글기초를 배우는 김순덕 할머니가 지각하셨는데요 사유인즉, 세수 깨깥이 하고 농협에 돈 삼만 원 찾으러 갔는디, 그동안 배운 이름 석 자 써먹으려고 펜대를 쓱~ 잡았는디, 아, 글쎄! 손가락이 벌벌 떨리고 기가 칵 막혀서리, 그만 내 이름을 잊어뿌랳지 뭐야! 푸하하하
도서관 바닥으로 하얀 틀니가 떨어지는 중입니다 유리창 밖, 찔레꽃잎이 하얗게 흩날리는 중입니다 자신의 이름도 모르는 산새들이 가갸거겨 지저귀는 봄날입니다
유금옥 시인 / 새와 꽃의 지능지수
낡은 함석집 스물두 채, 대관령 산골짜기 우리 마을 전체 주민은 34명입니다 16명은 알코올중독자이고 3명은 정신병자입니다 웃을 때 보면 뻐드렁니가 유채꽃보다 샛노랗습니다
햇빛 미끄러운 밭둑을 거닐다 이들을 만나면 얼싸안고 횡설수설 피어날 수밖에 없는 곳
전교생 6명, 우리 마을 초등학교 5명은 결손가정이고 그 중에 2명은 지체 장애자입니다 커다란 거울 앞에
화분이 놓여 있는 복도에서 이 아이들을 만나면 인사하고 또 인사하고 지지배배, 지저귈 수밖에 없는 곳
나무 이천이백 그루 산새 삼백사십 마리 우리 마을 새들도, 온전한 놈은 몇 안 되는지
봄 햇살 가득한 허공을 날아가다 꽃나무를 만나서 얼싸안고 지지배배 무슨 말을 나누는지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나는 부끄럽게도, 아직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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